밤바다
※ 허블 사무소 소속 스코시즘 로보 프로스터 2차 창작
※ 개인 해석 및 날조
살짝 이어집니다.
僕らの記憶を掠わないで
우리들의 기억을 앗아가지 말아 줘
검은 물은, 사람을 홀린다고 한다. 그래서 밤에 물을 보고 있으면 위험하다고. 그 물에 홀려서, 자기도 모르게 그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고. 그러니까 검은 물은, 밤바다는 오래 보는 게 아니라고 했다. 반드시 그 빛에, 어룽지고 흔들리고 유혹하고 너울거리는 물빛에 홀려 자기도 모르게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되니까.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그치고 세상의 바다는 하나가 되었다. 남아 있는 육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곳에서 다시 저들끼리 여기가 자기 땅이니, 여기가 자기 집이니 싸우기 시작했다. 비가 멎었으니 언젠가는 이 수면도 점점 낮아지고 낮아져 원래의 육지가 모두 드러나게 될 테지만 그렇게 되고 나서도 소금기를 머금은 땅은 쉽게 회복되지 않을 테고 인간들은 아주 오래, 오래 서로 다툴 테다. 인간의 그리 길지 않은 역사가 전쟁으로 얼룩져 있는 것처럼 앞으로의 길지 않은 미래도, 전쟁으로 얼룩질 것이다. 신은 실로 우리를 물로 심판하지 않았다. 우리는 자멸하고 있었다. 서로의 목에 칼날을 꽂아 넣으면서.
너는 해안가에 있었다. 세상의 거의 모든 곳이 바다가 되었으니 얼마 남지 않은 육지와 닿은 모든 곳이 해안인 셈이다. 바다는 훨씬 넓고, 깊어져서, 수평선은 아주 멀어져서, 수면은 너무 높아져서 이제 해도 달도 늦게 뜨고 일찍 져 버려서 그래서 낮은 짧고 밤은 길어서, 그래서 너는 밤으로 물든 바다를 바라보며 혼자 서 있었다. 너는 인간들이 땅이나 먹을 것을 두고 다투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너는 그저 발 딛고 서 있을 곳이 있으면 충분했고, 입으로 넣을 음식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았다. 너는 스스로 열량을 생산할 수 있었고, 태양이 있다면, 미세한 빛이 있다면 거의 영원히 그렇게 혼자 살아 있을 수도 있었다. 모든 인류가 사라져도 너는 홀로 그 땅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어쩌면 너는 인류의 역사를 기억하는 마지막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아주 먼 훗날, 시간이 흘러, 또 다른 생명체가 두 발로 걷는 법을 터득하고 오래 전 멸종한 인간의 흔적을 찾아 고대의 유물을 뒤적일 때 너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건 200만 년이라는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일 테다.
비가 그쳐 더 이상 숫자를 셀 필요가 없게 된 너의 입은 굳게 닫혀 있다. 너는 인간의 언어를 모두 이해하고 모든 언어로 의사소통을 나눌 수 있지만 그것도 상대가 없다면 아무 소용 없는 일이다. 너는 혼자 배를 타고 떠났다. 작은 네모난 창문이 서서히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너는 배가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소리가 거세졌다가, 작아졌다가, 거세지는 것을 들었다. 해가 떴다가, 졌다가, 달이 뜨고, 다시 지는 것을 보았다. 밤하늘을 길게 가르며 떨어지는 유성을 보았고, 외롭게 반짝이는 별을 보았다. 너는 우산을 쓰고 한 손에는 나무 상자를 들고 그저 배 위에 앉아 있었다. 누구도 묻지 않았기에 누구에게도 대답하지 않은 너의 마음을, 생각을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너는 그저 연녹색 눈동자로 푸르게 물들었다가, 붉어졌다가, 검어졌다가, 다시 붉고 푸르게 변하는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가끔 육지가 나타났고, 가끔 채 다 잠기지 않은 높은 빌딩의 꼭대기가 나타났다. 가끔 사람이 나타났고, 가끔 새가 너를 지나갔다. 가끔 개구리가 울었고, 가끔 물고기가 뻐끔거렸다. 너는 그 모든 것을 보고, 들었다. 하지만 너는 그 무엇에도 반응하지 않고 그저 그대로 동작을 멈춘 기계처럼, 고장난 기계처럼 우산을 쥐고 앉아 있었다. 다른 손에는 나무 상자를 쥐고, 그저 배가 흘러가게 내버려 두었다. 너는 갈 곳이 없었다. 어디에 안전한 땅이, 절대로 잠기지 않을 마른 땅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대로 비가 온다면 땅은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는 나무 상자 안에 있는 씨앗을 심을 수 없게 된다. 어떤 색의, 어떤 향기의 꽃이 가장 먼저 피어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너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꽃을 피우기 전까지는 돌아갈 수 없었다. 가장 먼저 핀 꽃을 보고, 향기를 맡고, 그것이 무슨 꽃인지 알기 전까지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러므로 너는 그저 표류했다. 해초처럼, 해파리처럼, 누군가 버린 쓰레기처럼 바다 위를 표류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비가 그쳤다.
너는 땅에 닿았다. 비가 그쳤으므로 더 이상 잠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땅이었다. 그 땅에는 이미 다른 인간들이 있었지만 상관 없었다. 너는 그저 꽃을 피울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았을 뿐이다. 젖지 않은, 소금기를 머금지 않은, 그래서 씨앗을 심을 수 있는 양지 바른 땅을 찾았을 때 너는 나무 상자 안에 있던 씨앗을 모두 심었다. 서로 엉겨 붙어 자라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를 방해하며 자라지 않도록 고르게 간격을 두고 심었다. 적당한 비료를 줄 수는 없었지만 너는 땅이 너무 질어지지 않도록 꼼꼼히 살폈고 물을 주었고 벌레가 먹지 않도록 살뜰히 보살폈다. 너는 처음으로 피어나는 꽃을 봐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었기에. 어떤 인간은 너를 발견하고 도움을 요청했고, 협력을 요청했고, 어떤 인간은 너를 협박했고, 어떤 인간은 너를 위협했다. 어떤 인간은 너를 부수려 했고, 어떤 인간은 너를 동정했다. 적지 않은 인간들이 너를 지나쳤지만 누구도 너를 도와 꽃을 피우지는 않았다. 인간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 지낼 곳을 필요로 했고 꽃은 그 무엇도 제공해 주지 않았으므로 인간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들은 돌아가기 위해 꽃을 피울 필요도 없었으므로, 어떤 인간은 너를 어리석다고 말했고 어떤 인간은 바보 같다고 말했다. 어떤 인간은 네가 고장난 것 같다고 말했지만 그 모든 것은 너에게 무의미했기 때문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았고 피해도 입히지 않았다. 너는 그저 꽃이 피길 기다렸다.
처음으로 연한 새싹이 땅 위로 고개를 들었을 때, 너는 어떤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인간들의 전문이었지 너의 전문은 아니었기에 너는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무엇에 의해 발생하고 무엇에 영향을 미치고 결과적으로 무엇을 가져오는지 알 수 없었다. 너는 오랫동안 그 감정을 분석하면서 뒤이어 싹을 틔운 꽃들을 보살폈다. 너의 눈 색과 꼭 닮은 연한 녹색의 새싹들은 무럭무럭 자라 짙은 줄기를 뻗고 커다란 잎을 피우고 탐스러운 봉오리를 맺었다. 그동안 많은 날이 지났다. 어떤 인간은 굶어 죽었고, 어떤 인간은 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어떤 인간은 배를 만들어 이곳을 떠났고, 어떤 인간은 집을 지었다. 어떤 인간들은 서로 다투다가 서로를 죽였다. 비는 멎었지만 인간들은 계속 줄어들었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생물인지도 모른다. 또 다른 자신과 공존하기에는 너무 서투르고 어린 종족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너는 묵묵히 꽃을 기다렸다. 커다란 꽃봉오리가 곧 피어날 것 같았다. 너는 그 꽃의 향기와 빛깔과 이름을 확인해야 했다. 너는 그 꽃과 함께 돌아가야 했다. 너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었다. 처음으로 피어난 꽃은, 샛노란 수선화였다. 물가에서 추위를 뚫고 피어난 꽃은 경이로웠다. 너는 새삼스럽게 생명의 끈질김에 대해, 경이로움에 대해 생각했다. 네가 처음 새싹을 보았을 때 느낀 감정이 그것이었을까, 생각했지만 그것과는 좀 다르다고 느꼈다. 너는 아직도 그 감정에 이름을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는 처음으로 피어난 이 꽃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싱그러운, 진한 특유의 향기와 샛노랗고 여린 꽃잎과 곧은 줄기와 짙은 녹색 이파리를 보면서 너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캐내었다. 뿌리 한 올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것을 흙과 함께 나무 상자로 옮겼다. 나무 상자는 이제 수선화를 위한 화분이 되어 있었다. 너는 비로소 돌아갈 수 있었다. 처음으로 피어난 꽃의 향기와 빛깔을 가지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너는 낡은 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그 땅을 떠났다. 인간들이 어지럽게 엉겨 붙어 서로를 죽이고 다투고 싸우고 살아남는 그 땅을 떠났다.
너는 흘러온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너는 정확한 방향과 거리를 알고 있었다. 모든 땅이 물에 잠기기까지의 정확한 날짜를 계산할 수 있었던 너는 처음 네가 떠나온 곳의 정확한 좌표를 기억하고 있었다. 배는 천천히 나아갔다. 그동안 해가 뜨고, 지고, 달이 뜨고, 졌다. 푸르다가 붉어졌다가 검어졌다가 다시 붉고 푸르게 물드는 바다 위로 잔잔한 물살을 그으며 너를 태운 배는 나아갔다. 마침내 네가 처음 떠나온 곳으로 도착했을 때,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바다밖에 없었다. 그곳에 있어야 할 작고 네모난 창문은 이미 물 밑으로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네가 돌아갈 곳은 물 속에 잠겨 있었다.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바다, 물, 바다, 물, 수평선.
너는 처음으로 핀 꽃을 들고 약속을 지키러 돌아왔지만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기다리겠다는 말은 지켜졌지만 그 기다림의 끝은 네가 아니었다. 너는 늦은 것도 이른 것도 그렇다고 제 때 온 것도 아니었다. 그저 처음부터 의미 없는 기다림이었을 뿐이고, 의미 없는 약속이었을 뿐이며, 의미 없는 작별이었을 뿐이다. 너는 이제는 수선화 화분이 된 나무 상자를 품에 안은 채, 가만히 그곳에 떠 있었다. 우산을 쓸 필요가 없어 이제는 태양과 달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선명히 지켜볼 수 있었다. 너는 의미 없는 숫자를 중얼거렸다. 그것은 네가 그곳을 떠나온 뒤 다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너는 온 세상이 비에 잠기는 순간 대신 그 시간을 헤아리고 있었다. 너는 문득 그 시간이 인간이 버티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또 너는 문득, 그 시간 동안 물이 너무 빨리 차오른 건 아닐까 생각했다. 또 너는, 처음부터 그 모든 것이 의미 없었음을 깨달았다. 기다리겠다는 말은 그저 너를 떠나 보내기 위한 말이었을 뿐이다. 잘 가라는 작별 대신, 영영 안녕이라는 말 대신 건넨 인사였을 뿐이다. 너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약속은, 지키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었나. 너는 또 다시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너는 그 감정에 대해 생각하며 오랫동안 그곳에 떠 있었다. 배는 움직이지 않았다. 수면은 고요했고 파도는 치지 않았다. 그래서 너는 닻 없이도 그곳에 고요히 떠 있을 수 있었다. 어쩌면 이미 닻을 내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해가 지고 달이 떴다. 사방이 어두웠다. 수평선은 가느다란 빛으로 희미했고 달은 창백했다. 너는 문득 수면에 비친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네가 아는 누군가를 닮아 있었다. 착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너는 그 그림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수면이 찰랑거리면서 그림자가 일그러졌다. 너는 다시 손을 거두었다. 잔잔해진 수면 위로 다시 그림자가 떠올랐다. 그것은 여전히 누군가를 닮은, 너의 것이 아닌 그림자였다.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너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만약 살아 있더라도, 이미 오래 전에 이곳을 떠났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너는 차라리 그랬기를 바랐다. 이곳을 떠나 어딘가 마른 땅에서 혹은 해안가에서 떠오르는 해를, 지는 해를, 떠오르는 달을, 지는 달을, 반짝이는 별을, 네가 보았던 그 모든 것을 보고 있기를 바랐다. 너는 그것이 부질없는 바람임을 알고 있었다. 아무 소용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너는 마침내 감정에 대해 이해했다. 감정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었고, 부질없는 것이었으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네가 처음으로 피어난 수선화를 보았을 때 느낀 감정도 텅 비어 버린 바다 위로 돌아왔을 때 느낀 감정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부질없었으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수면 위로 글씨가 떠오를 것 같았다. 그 또한 소용 없고, 부질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일 테다.
어두운 밤에서 수선화 꽃잎만이 달빛을 머금어 영롱했다.
너는 저 바다 아래 잠겨 있을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좁은 방. 눅눅한 커튼. 서서히 젖어 가는 바닥과 웅웅거리며 낮게 돌아가던 발전기. 낡은 책상과 의자. 손때 묻은 공책. 무언가가 잔뜩 적혀 있던 일기장. 책장에 꽂혀 있던 책과 저 깊은 수면 아래에서 건져 온 통조림 따위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눈을 감고 고요히 잠들어 있을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너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너는 이 땅이 모두 물에 잠기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알고 있었고, 처음으로 피어난 꽃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돌아오는 방향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모든 깨달음은 너무 늦게 찾아온다. 너는 또 다른 소용 없는, 부질 없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너는 고요히 잠든 그 얼굴이 느꼈을 추위에 대해 생각했다. 차가운 물과 잠기는 방과 젖어 가는 몸과 멀어져 가는 모든 것을 느끼고 감각했을 그 얼굴을 생각했다. 체온이 없는 너는 추위를 감각하지는 못해도 알 수는 있었다. 방수 기능이 있는 너는 젖지 않아도 잠길 수 있었다. 센서가 있는 너는 모든 것을 감각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검은 물이 넘실거렸다. 부드러운 손길로 네가 타고 있는 배를 쓰다듬었다. 바람도 없이 잔잔한데, 검은 바다는 조용히 넘실거리고 있었다.
君ならきっ
너라면 분명
見つけてくれる気がして
찾아 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밤바다 위로, 넘실거리는 밤바다 위로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 얼굴을 닮은 그림자였다. 수선화가 홀로 영롱했다. 너는 수면에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그림자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소용 없고, 부질 없고,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검은 물은 너무 아름다웠고 우리는 모든 것을 기억하면서 정작 중요한 것은 알지 못했고 물은 차갑지만 온도가 있는 너는 따스할 테니까.
배가 흔들렸다. 첨벙, 하는 소리가 났다. 수면이 크게 흔들렸다. 곧 모든 것이 조용해지고, 고요해지고, 잔잔해졌다. 수선화가 홀로 피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