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지 꽤 됐는데 기록을 까먹었었다.
오랜만에 읽은 구병모 작가의 책. 여전히 좋았고, 여전히 신선했다. 생소한 단어들을 많이 써서 신기한 작가 중 한 명. 역시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해야 하는구나 싶다.
매력적인 킬러와 그보다 젊은 킬러의 이야기. 청부살인업자이지만 나이가 들어서 그 칼이 무뎌진, 혹은 마음이 생긴. 그래서 더 인간적인.
사람을 죽여 온 사람이 갑자기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해도 그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럼에도 행복해지기를 계속 바라게 되는 이야기.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점점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것이겠지만 청부살인업자는 이미 죽음에 너무 가깝다.
그리고 이 업계에서 나이가 많다는 것은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실력이 대단함과 동시에 빨리 은퇴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실력으로 증명하면 나이가 많다는 단점을 커버할 수 있긴 하지만
실력을 녹슬게 한 것은 나이보다는, 마음.
권선징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느 정도는.
살아남기 위해서 살아남은 사람.
당장 수상한 사람에게 경동맥이 베일 위기에서 이런 친절하고 다정하며 헌신적인 말투라니.
조각은 최소한 신뢰를 잃은 채로 떠나고 싶지 않을 만큼은 이 일에 애정이 있었는데, 대놓고 애정이라고 하기엔 이 일의 성격상 좀 뜨악한 표현이고 몸을 움직여 일하는 데 대한 집념이나 원년 멤버로서의 집착 내지는 나 아니면 할 수 없단 식의 고집이라고 부르기에도 적절치 않은, 말하자면 탯줄과도 같은 감정이었다. 그것도 간신히 영양을 공급하다 불현듯 아이의 목을 단단히 감아버린 탯줄로, 언제 죽음으로 이어질지 모르는.
굳이 먹어보지 않아도 입안에 도는 감미, 아리도록 달콤하며 질척거리는 넥타의 냄새야말로 심장에 가둔 비밀의 본질이다. 우듬지 끝자락에 잘 띄지 않으나 어느새 새로 돋아난 속잎 같은 마음의.
파멸할 때는 사이좋게 손 잡고 지옥으로 떨어져야지 아무렴.
하나하나 뽑아서 손가락 끝마다 꽃잎이 피어나면 좀 더 예뻐지겠지. 화려해지겠지. 핏빛보다 고운 빨강, 세상에 다시 없으니. 비록 공기에 닿자 거무칙칙해지더라도, 더러워지기에 오히려 깊고 잔혹한 빨강.
이제 내가 당신에게 뭐라고 하면 좋을까.
이제 내가 당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것은 기억과 호환되지 않는 현재였고 상상에 호응하지 않는 실재였으며, 영원히 괄호나 부재로 남겨두어야만 하는 감촉이었다.
이거 소질 있네.
그랬는데 이제 와서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고 생겨나는 연민이라니, 살과 뼈에 대한 새삼스러운 이해라니.
그중 하나는 지금껏 골몰해온 대로 늑골을 다 열어 심장을 꺼내보기 전에는 그 심리를 알지 못할 투우-일지도 모르는 사람-의 기묘한 방해 공작에 대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조금 편찮은 정도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는 장 박사에 대한 안쓰러움 비슷한 감정이었는데, 그 느낌은 리어카 노인을 거들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궤적을 그렸으며, 서로가 소멸의 한 지점을 향해 부지런히 허물어지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되는 서글픔을 포함하고 있었다.
"근데 자격은 없지."
그러나 이 마음은 어디에도 파종할 수 없이 차가운 자갈 위에서 말라비틀어져 마땅할 터였다.
나를 떼어 보내고 당신 혼자 죽을 작정이라면 차라리 끝까지 함께 가서 지옥에 나란히 떨어지기로. 어차피 우리 모두 조와 아기가 있는 곳에 가기는 글렀으니.
"그렇게 되면."
당신을 따라갈까요.
"너도 나도, 지켜야 할 건 이제 만들지 말자."
미안합니다. 그건 나 때문입니다. 내 눈이 당신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 눈으로 심장을 흘리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후회하는 건 아니니까요."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하나의 존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혼이라는 게 빠져나갔는데도 육신이 더 무거워진다는 것은.
단지 동전이 바닥났을 뿐인데 조각은 지금껏 형태를 유지해온 자신의 남루한 삶 전체를 비워나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동안 특별히 그래야 할 이유가 없어서 미뤄왔지만 이제 오늘이야말로 당신에게 가는 일을 더이상 늦출 수는 없을 것 같다.
보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어떤 심장의 소용돌이들.
"네가 바로 그 애구나."
"정말, 기억해?"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