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0. 태초에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

By 민트박하 | 2026.05.11 21:54

 

 



 

※ 허블 사무소 소속 스코시즘 로보 프로스터 2차 창작

※ 개인 해석 및 날조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

 

신은 인간을 만들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과 자유 의지와 여러 가지 감각과 내장 기관 등을 만들었다. 인간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뇌가 반드시 필요한데, 이 뇌는 산소와 영양분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인간은 호흡기를 통해 공기를 마시고 폐를 통해 산소를 걸러내고 심장에서 피를 뿜어내 산소를 실어 보낸다. 그런 식으로 인간의 장기가 만들어진다. 더 많은 산소와 영양분을 뇌에 보내기 위해 심장이 더 커지고 폐가 커지고 공기뿐만이 아니라 음식을 섭취하고 소화하기 위한 장기가 생기고 영양소를 모두 걸러낸 뒤 남은 폐기물을 배출하는 기관이 생겨났다. 더 편리하게 움직이기 위해 손과 발이 자라났고 손을 더 자유롭게 쓰기 위해 두 발로 걷는다. 그러니까 인간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뇌가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호흡하고, 음식물을 섭취하고 소화하고 배설하면서 인간은 생각하고 말하고 활동하고 기능한다. 즉, 일종의 시스템을 갖춘 것이다.

 

신이 자신의 모습을 따라 인간을 만들었듯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따라 너를 만들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처럼, 인간은 너를 발명했다.

 

너는 굉장히 인기가 좋았다. 지금까지 인간을 닮은 꽤 많은 기계들이 만들어졌고 판매되었고 여기저기 사용되고 있었지만 너는 그 중에서도 가장 발달한, 훌륭한 성능을 갖추고 있었다. 가장 최근에 나온 핸드폰이 가장 좋은 기능을 갖추고 있고, 가장 최근에 나온 컴퓨터가 가장 좋은 기능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너는 최신 로봇이었다. 사람들은 너를 샀고, 자신의 집에 들였다. 너는 어떤 집에서는 요리사가 되었고 어떤 집에서는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어떤 집에서는 가사 대부분을 담당했고 어떤 집에는 친구가 되어 주었다. 너는 모두 다르게 생겼었다. 모두 좋아하는 외모가 다 달랐기 때문에 너는 어떤 집에서는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어떤 집에서는 금색 머리카락과 녹색 눈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집에서는 흰 머리카락에 어두운 피부와 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너는 키도 체격도 모두 달랐다. 사용하는 언어도 모두 달랐다. 당연히 너는 성격도, 말투도, 행동도 모두 달랐다. 그런데도 그 모든 것을 ‘너’ 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네 등, 목 아래에 새겨진 모델 넘버가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너에게 모두 다른 이름을 붙여 주었지만 일반적으로, 너를 통칭하는 이름은 그 삭막한 모델 이름이었다. 영어 알파벳 몇 개와 숫자 몇 개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그 모델명을 나는 전혀 외우지 못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또 다른 최신 모델이 나왔고 사람들은 다시 그 최신 모델에 열광했다. 핸드폰을 바꾸고 컴퓨터를 바꾸듯, 사람들은 금방 너를 새로운 모델로 바꾸었다. 너를 만든 곳은 너를 데려오면 새로운 모델로 바꿔 준다는, 선착순 100명 한정 이벤트도 진행했고 너는 또 다른 너로 교체되었다. 그건 너인 동시에 네가 아니었다. 어느 정도는 너였지만 어느 정도는 네가 아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최신 모델이 나왔고, 너는 천천히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가듯 새로 나오는 최신 모델에게 자리를 비켜 주게 되었다. 물론 너를 장만하는 비용은 어지간한 비용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여전히 너를 쓰는 사람들은 무척 많았다. 돈이 많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나 최신 모델이 나올 때마다 너를 갈아 치우듯 바꾸었을 뿐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너를 또 다른 너로 바꾸어갔다. 인기가 좋았던, 그래서 거의 모든 집에 갖추어져 있었던 너는 조금씩 사라졌다. 다른 네가 그 자리를 채워 갔다. 그렇게 너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런 게 몇 번이나 더 반복되었다. 

 

너는 점점 더 사라지고, 없어지고, 점점 더 드물어졌다.

 

내가 너를 만난 것은 그런 게 정말 많이 반복되어서 네가 거의 잊힌 어느 겨울이었다. 눈이 굉장히 많이 오는 겨울이었는데, 요즘은 그런 때가 잦았다. 여름에는 폭우가 자주 쏟아졌고, 겨울에는 폭설이 자주 내렸다. 봄과 가을이 거의 다 사라지고 해수면이 높아지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저 바다 아래로 내려가 그들의 공간을 만들어 살고 있었다. 굉장히 똑똑한 사람들이 말하기를, 언젠가는 바다가 모든 육지를 삼켜 버릴 거라고 한다. 바다 아래에 있는 도시로 이사를 갈 수 있는 사람은 돈이 아주 많거나 아주 유명하거나 아무튼 굉장한 사람들이었고 나는 그런 사람에 속하지는 않았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육지의 얼마 남지 않은 도시의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한 동네의 골목에서 너를 발견했다.

 

너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버려진 지 꽤 오래 된 것 같았다. 네 위로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어서, 나는 처음에 네가 아주 커다란 곰 인형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연인들이 주고받는 그런 커다란 곰 인형.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을 때, 나는 네가 곰 인형 치고는 팔다리가 더 길고 몸이 통통하지도 않고 얼굴이 둥글지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는 곰 인형은 아니었다, 확실히. 나는 네 앞에 웅크리고 앉아 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 네 이마를 검지로 눌러 바로 세워 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흰 피부를 가진 너는 아마 배터리가 다 된 것 같았다. 내가 검지를 떼자 너는 다시 바로 고개를 푹 떨구었다. 나는 금방 흥미를 잃고 그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너를 지나쳐 걸었다.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너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발 아래로 밟히는 눈이 뽀드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뭉개졌고 네 위에는 눈이 더 듬뿍 쌓여 있었다. 내가 잠깐 고개를 들게 해서 머리와 얼굴에는 상대적으로 눈이 적었지만 어깨와 팔다리, 몸 위로 온통 눈이었다. 너를 폐기하는 방법으로는 사실 이건 옳지 못한 방법이었다. 너는 상당히 덩치가 크고 무게도 나가는 편이기에, 너를 처분하기 위해서는 관할 지역 담당 관리소에 신고를 해야 했고 수거 일자를 예약해서 직원들이 너를 데려가도록 해야 했다. 물론 너를 처분하는 데에는 상당한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주 이렇게 너를 아무렇게나 버리는 것을 선택했다. 보통 그런 식의 무단 투기는 벌금을 물게 되어 있었지만 너는 너무 오래 전 모델이었기 때문에 버린 사람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사람도, 너를 버린 사람도 자신이 누구인지 들키지 않을 것을 알고 너를 이렇게 버렸겠거니 싶었다.

 

나는 다시 네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너는 여전히 고개를 푹 떨군 채 눈이 잔뜩 쌓여 있었고 너무 많이 쌓여 뭉개진 눈은 이제 얼음 덩어리처럼 변해 있었다. 나는 손 끝으로 네 속눈썹에 얼어붙어 있는 눈을 털어냈다. 그러니까 나는 네 눈 색이 문득 궁금했던 것 같다. 나는 너를 알고 있었지만 사실 너를 모르고 있는 것과 다름 없었다. 네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는 세상이 워낙 떠들썩했으니까, 너를 모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너는 어떤 사람에게 어떤 집에 가는지에 따라 전부 달랐으니까 머리카락과 피부 색을 본다고 해서 눈동자 색을 유추할 수는 없었다. 머리카락과 같은 색일 수도 있었고, 다른 색일 수도 있었고, 세 개나 네 개의 색이 섞여 있을 수도 있었다. 네 눈꺼풀을 들어 올려 눈동자 색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네 눈썹과 눈꺼풀과 속눈썹 위를 덮고 있는 성에와 눈송이를 털어 내고 단단히 감겨 있는 네 눈꺼풀을 꾸욱 눌러 위로 올려 보려 했다.

 

 

“하지 마.”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고 그 반대로 너는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네 눈 앞에 검지를 뻗은 채로 굳었는데 너는 반쯤 눕다시피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켜 제대로 앉으면서도 눈을 뜨지 않았다. 등을 바로 세우고 제대로 앉은 너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채로 입을 다물었고 나는 순간 환청을 들은 건가, 하는 생각까지 했지만 움직인 네 몸 위에서 미끄러지고 흘러내린 눈이 주위로 쌓여 있었으므로 나는 그것이 환청이 아니었고 네가 분명히 움직였음을 알 수 있었다. 어, 그러니까. 나는 다시 손을 뻗어 조금 더 멀어진 그리고 조금 더 높아진 네 눈 앞으로 검지를 가져갔다.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시 내 손가락이 네 눈꺼풀을 눌러 올리기 직전 네가 다시 말했다.

 

 

“하지 말라고 했다.”

“오…….”

 

 

살아 있었구나. 나는 중얼거렸지만 너에게 말을 걸었다기보다는 혼잣말, 감탄사 같은 것이었기에 너는 대꾸하지 않았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너를 향해 나는 부탁했다.

 

 

“눈 한 번만 떠 볼래?”

“…….”

 

 

너는 입을 다문 채 다시 죽어 있었다. 나는 잠시 대답을 기다리다가 다시 검지로 네 눈꺼풀을 누르려 했고 너는 내 손목을 붙잡아 멈춰 세웠다. 그러면서도 너는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나는 다시 부탁했다. 눈 한 번만 떠 봐. 너는 눈을 뜨지도 않았고, 내 손목을 놓아 주지도 않았다. 놓아 주면 바로 눈꺼풀을 눌러 눈동자의 색을 확인해 볼 생각이었기 때문에 네가 네 눈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였다면 아주 옳은 결정이었지만, 나에게는 불만스러운 결정일 수밖에 없었다. 너랑 나는 그 상태로 잠시 대치했고, 팔이 아파 오기 시작한 내가 결국 다시 먼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놓아 줘.”

 

 

너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기요. 내 힘으로는 네 손을 떨쳐낼 수 없었다. 나는 손목을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며 시도해 보았지만 결국 실패했기 때문에, 다시 말했다. “놔라.” “싫어.” 너는 즉답했다. 여전히 눈도 뜨지 않고.

 

 

그딴 게 너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SERIES

‘로보 프로스터’ 에피소드 목록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