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서하
이 비의 계절에 너와 나는 결코
여름이 짙어지면 반드시 장마가 길었다. 해가 길면 밤은 짧아지는데 밤이 길어도 해는 좀처럼 짧아지고 싶어하지 않았다. 땅을 비추는 빛이 그 땅을 진저리나게 싫어하여 모든 것들이 말라 죽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리쬐는 것을 그 어떤 신을 받은 무당이라고 해도 모를 것이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내렸고 그래서 해는 뜨지 않았으나 그는 그것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날이 더워질수록 해가 일찍 떴기에 이미 저 하늘 높이 햇살이 비추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구름이 무겁게 짙게 깔려 밤처럼 어두웠다. 빗줄기는 거세지 않았지만 꾸준히, 꾸준히 내리고 있었다. 마치 이 땅이 빗물을 적당히 마실 정도를 맞춰 주고 있는 것처럼. 땅이 눅눅하게 젖었지만 걷기 힘들 정도로 질어지지는 않았다. 바람이 불긴 했지만 농작물이 쓰러질 정도로 세차지는 않았다. 온통 물이었고 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힘들 것도 달라질 것도 없었다. 비가 오기 때문에 일을 나가지 못하게 된 이들이 오랜만에 얻은 휴일이라고, 마루에 바지를 걷어 올리고 다리를 내놓은 채 수박을 한 입 씹어 먹으며 웃었다. 처마에서 빗물이 맺혔다가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어디선가 개구리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물새들이 수면을 쳤다. 들짐승이 옹달샘에서 맑은 물을 마셨다. 사람들은 하늘이 이 땅을 사랑하시어 비를 내려 주신다고 할 것이다. 인간들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하늘이 이 땅에 살아 있는 것들을 아끼어 기나긴 여름을 쉬이 보낼 수 있도록 오랜 비를 내려 주신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정작 누구에게 어떻게 사랑받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쉽게 사랑과 아낌을 입에 올렸다. 쉬이 뱉고 책임지지 않았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은은한 바람이 불었다. 빗소리가 나즈막했다. 맑고, 조용한 빗소리가. 밤이 되면 비가 잦아들었다. 낮에 해가 뜨지 않아 달아오르지 않았던 공기는 선선했다. 사람들은 우산을 내려 놓고 밤산책을 나왔다. 구름이 걷혀 맑은 하늘에는 별이 반짝였다. 좋은 여름 밤이었다. 무덥지 않고, 습하지 않고. 시원하고 고요했다. 비가 내리는 동안 어느 풀잎 아래 숨어 빗물을 피하던 찌르레기가 작게 울었다. 별들이 소란거렸다. 저렇게 밝은 걸 보니 내일은 간만에 해가 좀 뜨려나 보다. 젖은 땅을 말리고 뿌리가 썩지 않도록 따스히 공기를 데우고 새들이 날아다닐 수 있도록 빛을 내려주시려나보다. 사람들은 쉽게 말하고 쉽게 짐작한다. 그저 그럴 것이다, 라고 말하고는 잊어버린다. 그들의 말은 빗방울보다 덧없고 쉽게 지워지고 땅에 고인 물웅덩이보다 쉽게 증발해 사라진다. 모든 것이 그저 덧없고, 허무하고, 짧을 뿐이다. 그 어떤 것도 자신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하물며 세상을 어떻게 책임지겠느냐고. 아무도 아무것도 감당하지 않는데.
그 어떤 인간도 감히 발을 들여 놓을 수 없는 곳에 두 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흰 손을 깍지 껴 굳게 잡았다. 한 사람이 쥐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주고 있었다. 그렇게 힘을 줘도 불편하지 않다는 듯 나른하게 서로 어깨를 기대어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은 맑았고, 군데군데 비가 오고 있었다. 소나기가 내리는 곳이 있는가 하면 곧 한바탕 쏟아질 듯 먹구름이 스멀스멀 하늘을 덮어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감히 그렇게 놔 두지 않았을 서 하는 기꺼이 무은열이 원하는 만큼 비를 내릴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도 모자라 필요하다면 볕을 내어 주었다. 이 모든 것이 이 계절의, 이 여름의 장마이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비가 내리는 것도, 하가 열에게 하늘을 양보하는 것도, 열이 하에게 곁을 내어 주는 것도. 그래서 하는 원하는 만큼 열의 팔을 끌어안고,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그 머리카락에 입술을 부빌 수 있었다. 그 동안 비가 내렸다. 낮에도, 밤에도 비가 내렸다.
무자비한 양陽의 용은 인간들을 모두 불사를 듯 볕을 내렸으나 자애로운 음陰의 용은 인간들을 사랑하시어
하는 열의 뺨을 가만히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세상 따위 어찌 되든 아무것도 상관 없어질듯 모든 것이 잊혀졌다. 그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구겨지지 않은 맑은 눈으로 응시하고, 입을 열어 서 하, 하고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이 좋았다. 한 번만 더 이름을 불러 다오, 열아. 내 이름을. 하는 고집을 부려 몇 번이나 열에게 제 이름을 뱉어내도록 청했다. 서 하. 인간에게 하듯 그는 하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불러주었다. 하는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손으로 코와 입술 끝을 더듬었다. 바르고, 고운 피부 위에 부드러운 입술이 도톰했다. 마치 입을 맞추듯 엄지 손가락으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그 입술선을 따라 어루만지던 하의 손이 그의 턱을 지나 목덜미를 훑었다. 손바닥에 오롯하게 새기고자 하는 것처럼 집요하고 느린 손길이었다. 해를 관장하는 용의 손은 따스하고 포근하여 그토록 많은 비가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말라 보송보송했다. 건조하지만 거칠지 않은 손바닥이 목덜미를 느리게 둘러 감싸듯 어루만졌다. 엄지손가락 아래 목울대를 스치며. 열아. 하는 나즈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열은 대답하지 않고 눈을 아래로 내려 하를 바라보았다. 서 하는 열의 어깨에 이마를 완전히 기대고 있어 눈을 마주할 수는 없었지만 잔잔히 미소 지은 채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열아. 은열아. 오냐. 작게 대답하는 열이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에 따라 손바닥 아래 있는 목울대가 들썩였다. 그 작은, 생명의, 살아 있는 것들의 작고 가냘픈 움직임에 하는 또 다시 작게 웃었다.
" 좋지 않니. 이러고 있는 거. "
" ……그래. "
그는 많은 말을 아꼈다. 굳이 말로 꺼내지 않은 단어들이 짧은 침묵 사이에 파묻혀 죽어갔지만 하는 그가 꺼내지 않은 말을 알고 있었다. 네가 조금만 더 자애롭게 군다면. 조금만 더 저들을 사랑해준다면. 조금만 더 마음을 곱게 쓴다면 우리는 어쩌면 이 계절 뿐만이 아니어도 이렇게 있을 수 있을 거라고.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하는 그가 하고 싶어하는 말을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은열 역시 서 하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그를 길들이곤 했다. 아주 작은 사탕 하나를 입 안에 굴려 넣어주고는 사탕이 다 녹을 때까지 구슬리고 어르는 꼴이었다. 사탕은 금새 다 녹아버리고 서 하는 언제나 제멋대로 굴곤 했다. 이 장마가 끝난다면 전보다 더 심한 가뭄이 올 것이다.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볕이 쉬지 않고 내리쬘 것이다. 끝나지 않는 여름이 올 것이다. 서 하는 그런 식으로 심술을 부리곤 했다. 그저 무은열이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시간동안 서 하의 기분을 달래어 적어도 그가, 조금 덜 심술을 부리도록 토닥이는 것이다. 서 하는 변덕이 심했고, 자주 심술을 부렸다. 그러므로 하는, 열이에게 굳이 채근하지 않고 조금 더 그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몸이 더욱 바짝 달라붙어 체온을 나눌 수 있도록.
비가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 하가 있는 곳은 조금도 젖지 않았고 서 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은열의 몸은 조금도 마르지 않았다. 눅눅하게 젖어 빗물을 한 방울 한 방울 떨구고 있는 머리카락의 끝을 가볍게 입술 끝으로 머금으며 하는 웃었다. 맑고, 청량한 기운이 입 안에 차갑게 퍼졌다. 항상 얽혀 있으면서도 절대로 섞일 수 없는 것이 음陰과 양陽이었다. 하가 은열의 본거에 와 있다 해도 하는 젖지 않았고 만약 은열이 하의 본거에 온다 하더라도 은열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섞일 수 없는 것이 닿을 수 없는 것은 아니어서 오히려 하는 그러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제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는 유일한 존재. 이 세상의 시작을 함께 했고 이 세상의 끝까지 함께 해야 하는 오롯한 짝. 자신을 말리기도 하고 부추기기도 하는, 거슬린다고 해서 죽여버릴 수 없는, 멋대로 지울 수도 살릴 수도 없는 제 손아귀 바깥에 있는 것. 그렇기에 하는 그가 여전하기를 바랐고, 변하기를 바랐으며, 그가 자신의 것이 되길 바라면서도 영원히 자신의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인간을 사랑하는 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인간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하지 않는 그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우면서도 죽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인간을 버리지 않을 너는 결국 나를 사랑하지 않겠지. 마음에 비수가 박힌 듯 아프지만 그렇기에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열아, 하는 그의 이름을 서투루 부르고 쉬이 불렀다. 오직 이 세상에서 자신만이 그럴 수 있다는 듯이.
" 비가 약해졌어. "
" 거센 비만 내리면 힘들어하니까. "
…인간들이 말이지. 서 하는 작게 속으로 그가 삼킨 말을 덧붙이고 웃었다. 그는 사랑한다. 그리고 그는 사랑한다. 영원히 어긋나 있기를 바란다. 서 하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을 풀어 어깨를 잡았다. 지그시 힘을 주어.
" 오직 그것 때문이니. "
" ……. "
" 네가 비를 내리고 내리지 않고, 밤이 오게 하고 겨울이 오게 하고. 그 모든 게 전부 그것 때문이니. "
그거 하나 때문에 네가 살아 있는 것이냐고. 열은 가만히 서 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침착하고, 차분하고, 무엇 하나 죄스러워 하지 않는 곧은 눈이었다. 그는 그가 옳다고 생각한 것을 고수하였고 그는 결코 틀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비뚤어져 있는 쪽은 자신이었기에 그 눈은 옳았다. 그러나 하는 그 눈이 싫었다,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결국 저 미물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것이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뱉는. 그것이 옳기에, 그것이 바른 신이기에.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신이기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자신에게 너는 잘못되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싫었다. 열아. 하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열이 먼저 대답했다.
" 너는 그렇지 않다는 거냐. "
" 나는 그렇지 않다, 열아.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아. "
나는 그런 신이 아니다. 나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 열의 어깨를 쥔 하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열아, 은열아. 무은열. 서 하는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바로 앉아 있던 그의 어깨를 짓눌러 바닥에 눕히고는 허리 위로 올라탔다. 지그시 그를 내려다보면서, 자세가 흐트러졌음에도 어디 하나 당황한 구석 없는 그를 울 듯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결국 항상 일그러진 눈을 하는 것은 자신이었고, 망가지고 비틀리는 것도 자신이었다. 아무리 쥐어 짜내려 해도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지저분한 오물을 손에 쥐고 있던 것처럼 더럽혀지는 것이 자신의 손이었고 가시덤불을 끌어안고 있던 것처럼 상처 나는 것이 자신의 품이었다. 은열은 차분히 입을 다문 채 자신의 위에 올라와 있는 하를 바라보았다. 익숙하기도 하고, 익숙하지 않기도 한 시야였다. 그는 누군가를 자신의 위에 둔 적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나 서 하는 그의 위에 오르고자 하면 얼마든지 오를 수 있는 존재였고 다만, 이 둘이 이토록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순간이 없었을 뿐이다. 해가 지면 달이 떠야 하고 비가 그치면 볕이 내려야 하기에. 여름이 끝나면 겨울이 오고 해가 비추면 그늘은 사라져야 하기 때문에. 서 하는 손톱이 그의 어깨에 박힐 듯 힘을 주었다.
" 너도 알지 않니. 나는. "
" 해가 뜰 시간이다. "
그까짓 해. 그까짓 것. 자신의 말을 썩뚝 끊는 은열의 목소리에 서 하는 치를 떨며 고개를 파르르 흔들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서 하는 은열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천천히 그의 위에서 내려오며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가 서서히 그치고 있었다. 기나긴 장마의 절반에 해가 잠시 고개를 비춰 땅을 마르게 하고 볕을 내려 숨을 돌리게 해야 하는 날이었다. 입술이 피가 나도록 깨물며 서 하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곧게 다리를 펴고 선 그는 은열에게 등을 보인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계절에, 비가 오는 이 계절에. 너와 나는 결코.
비가 그치고 있었다. 너는 떠나겠지. 막을 수 없는 섭리와 거스를 수 없는 순리가 있어 서 하는 화를 삼키듯 입 안으로 혀를 잘근잘근 씹었다. 핏물이 고이고 입술에 피가 배도록. 한 걸음을 앞으로 나간다. 그림자처럼 햇살이 그의 발치에 따라붙었다. 비가, 그치고 있었다. 구름이 걷히고 먼 하늘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서 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비가,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영원히, 더. 네가 떠나지 않도록. 아주, 아주 느리게 서 하는 무은열의 곁에서 멀어졌지만 은열은 서 하를 부르지도 붙잡지 않았다. 그치지 않는 비의 계절에도 우리는 결코 우리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