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여름밤

서하

By 민트박하 | 2026.05.09 15:47

  

 

 

 

 

 

    '한 치 앞이 보인다면, 한 치 앞을 알 수 있다면 다시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너를 사랑하지 않았겠지만 우리의 운명은 처음부터 천명처럼 타고날때부터 주어진 것이라서 어쩌면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이 이 생에 있는 단 하나의 이유라고 한다면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네 생에서의 이유일까.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을 테지만 말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는 것들이 있어서 먹구름이 오고 나면 반드시 비가 오고 그 다음 반드시 날이 개어 해가 비치는 것처럼 내가 오면 네가 달아나고, 내가 떠나면 네가 오는 것처럼 반드시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겠지. 너에게 말해야 할 것이 하나도 없는데도 나는 네 옷소매를 붙잡아 시간을 늘이고 끌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그런 대화를 아니 일방적인 나의 애원을 견뎌내야 했던 너를. 우리는 그런 시간을 나누어 삼켰고 목구멍 안으로 가시가 돋혀 있는 것 같아, 자꾸 목이 메어. 비가 더 오면 좋겠다, 장마가 아주 더 오래 갔으면 좋겠다. 비가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밤이 지나면 모든 것이 다시 순리대로 돌아가고 모든 것이 다 지나가 버린 일이 되어 버리겠지만 우리의 찰나는 영원보다 길고 의미 있어서 나의 찰나가 너의 찰나가 될 수 있다면 나의 하룻밤이 너의 하룻밤이 될 수 있다면 나는 이대로 죽어버려도 좋아. 내 죽음은 내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나는 너를 위해 쉽게 목숨조차도 버릴 수 없지만 너는 알겠지, 나는 쉬이 죽어버리고 싶어지는 존재이고 너는 나를 쉬이 죽어버리고 싶게 만드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한 번도 닿은 적 없는 것 같아. 우리는 한 번도 닿아서는 안 되었던 것 같아. 우리는 우리라고 불러서는 안 되었던 것 같아. 내가 떠나면 너는 안심하고 내가 오면 헝클어지는 마음을 알고 있었어서 그래서 나는 네가 좋았어. 나를 싫어하는 네가 좋았어.

 

 나를 조금만 더 미워해 줘.

 

 비가 오는 밤에는 별이 없어서 어둡고 어두운 날에 나는 이 밤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길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너의 손목을 붙잡고 손바닥 안쪽 여린 살을 문질렀어. 간지러워 하는 네가 웃었으면 했어, 네가 조금만 더 웃었으면 했어. 나를 보고 웃어 줬으면 했어. 우리는 우리라고 부를 수 없지만 우리의 공통점을 몇 안 되는 그것들을 전부 이어보고 나면 그게 너무 적어서 훨씬 초라한 기분이 들겠지만. 나는 너를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없어서 자꾸 웃음을 흘렸고 너는 마음에 들지 않아 했지만. 내가 너를 보고 웃을 때 모든 것이 진심이었다는 걸 진짜라는 걸 알고 있어서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아 했지만. 조금만 더 내 손을 잡아 줘. 차가운 네 손이 내 손을 식히게 해 줘. 내 마음이 완전히 차가워지게 해 줘. 나는 조금만 더 비에 젖고 조금만 더 차가워지고 조금만 더, 울고 싶어.

 

 이 여름밤에는 아무 거짓말도 하지 않을게. 이 밤에는 어떤 말도 꾸며내지 않을게.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고. 너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나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조금만 더 같은 마음이었다면 네가 나를 받아주었을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었을까. 그게 누구도 바라지 않는 것이지만. 아무도 원하지 않는 행복한 마지막을 나 혼자 바라고 있어서 너는 조금 더 이 세계를 사랑해서. 너는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해서 거기에 다른 누군가를 더 사랑할 공간이 없어서. 사실 거짓말이야, 그 곳에 내가 들어갈 자리만 없다는 걸 알아. 너는 인간을 사랑하니까 또 다른 인간을 사랑하지. 인간은 매번 새롭게 태어나고 새롭게 죽어서 새롭게 네 앞에 나타나니까. 나도 죽어 다시 태어나서 네 앞에 나타나고 싶어, 그러면 네 마음 속에 조금 더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오늘은 거짓말을 조금만 할게. 오늘은 조금만 가짜를 꾸며낼게. 어떤 진실은 꼭 거짓을 닮아 있고 어떤 거짓은 정말 진실을 닮아가잖아. 내 거짓말은 어떤 진심에 가까울테니까 내 진짜를 전부 다 알고 있는 너에게 조금만 거짓을 꾸며낼게.

 

 오늘은 비가 더 많이 오길 바라고 있어.

 

 장마는 끝나가고 여름이 지나가고 있어. 이 계절이 끝나고 가을이 지나 겨울이 오기를 바라고 있어. 네가 오길 바라고 있어.

 

 오늘은 비가 많이 와서 네 생각이 많이 났다. 나는 조금만 말하고 조금만 웃는다.

 

 너는 인간을 사랑해야 해. 네가 말했다. 너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돼. 너는 화가 나서 말했다. 나는 네가 화가 난 것이 나 때문이라는 게 즐거워서 조금 웃었다. 나는 너를 사랑해. 나는 웃으며 말했고 너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일어나서는 안 되는 비극인 것처럼. 내 사랑은 비극이 되었고 나는 너를 사랑해서는 안 되었고 너는 내 사랑을 받아줄 수 없었고 우리는 영원히 이런 식으로 끝나지 않는 말싸움으로 서로를 마주보면서 끝끝내 아무런 접점도 찾지 못하고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가게 되어 버리고. 우리는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나는 그 곳에서 손을 가끔 뻗어 보지만 빗물이 내 손에 닿기도 전에 식어버리고 말라버려서 그래, 이게 네 마음이구나. 나에게 닿기조차 원하지 않는 네 마음이구나. 하고 웃어버리고. 너의 그 일방적이고 변함없고 꿋꿋한 거절이 좋아서, 그게 너라서. 그래, 네가 여기 있구나. 나는 조용히 몸을 웅크린다. 둥근 모양으로 해가 뜨도록 조금 웃어본다. 이 곳에서 나는 너를 상상해, 네가 조금도 없는 곳에서 네가 여기 있다고 끼워넣고, 끼워맞추고. 너는 그렇게 괴로워한다. 억지로 내가 너를 맞추어 넣었기 때문에 좁은 틈에서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인상을 찡그리고.

 

 비가 그쳐가고 있어. 장마가 끝나가고 있어.

 

 오늘은 비가 오지 않아서 네 생각이 많이 났다. 나는 조금만 말하고 조금만 웃는다.

 

 비가 조금도 오지 않아서. 마른 하늘이 서먹해서. 입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도 들어오는 것이 없어서 자꾸만 혓바닥이 말라가서. 입천장이 버석해져서 침을 삼키면 목구멍이 따가워서. 비가 왔으면, 비가 많이 왔으면. 한 방울이라도 내렸으면. 네가 없어서 네 생각이 나고 네가 있어서 네 생각이 난다. 네가 없으면 없는대로 있으면 있는대로. 나는 너를 그리다가, 허공에 그려보다가. 네가 원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더욱 선명하게 너를 그려낸다. 여기 너는 너무나 구체적으로 또렷해서 나는 네 얼굴에 손을 뻗었어. 너는 뒤로 내 손을 피해 한 걸음 물러났다. 아주 조금, 조금. 마음이 아파. 이제 비가 그치고 있어. 장마가 끝나고 있어. 모든 것이 지나가고 있다. 시작한 것은 끝이 나야 하고 끝이 있는 것이어야만 시작할 수 있다. 나는 끝을 준비하러 한 걸음을 걷는다. 아주 느리게, 한 걸음을. 또 한 걸음을. 너는 어디쯤 와 있을까. 어디를 걷고 있을까. 나는 너와 나란히 걷고 싶었어. 너를 찾아 고개를 돌린다. 어지러울 정도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네가 아주, 아주 멀리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너를 느낄 수 있고 너는 나를 느낄 수 있어. 나를 피해 달아난 네가 누군가와 함께 있어서,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생각하면 이 여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

 

 끝나가는 것에 인사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

 

 

 그래.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러면 나는 인간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고 공연히 땅을 태우지 않을 것이고 심술을 부리지도 않을 것이고.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으면. 네가 나에게 말했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렇다면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은 기분이 들겠지. 인간들이 행복해지고 그래서 네가 행복해지고 그래서 네가 나를 향해 조금이나마 웃을 기분이 든다면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난다면. 그것도 하나의 끝이라면, 그렇게 하나가 지나간다면. 그렇게 네가 나를 향해 웃을 수 있다면. 내가 있는 곳에도 비가 내릴 수 있다면. 나는 조금 웃고 조금 운다. 나는 울고 싶을 때도 울 수가 없는 것 같아.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금방 말라붙는데 빗물인지 눈물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나는 항상 빗속에 서 있고 싶었으니까 이건 네가 나에게 조금만 허락해 준 빗물인 것 같아서 나는 내가 우는지 울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한 번도 울어보려고 한 적이 없어서. 울 수 있다는 것을 몰라서. 너를 위해 울고 싶었는데 너는 인간들을 위해서만 우니까. 너는 금방 죽고 금방 사라지는 것들을 위해서만 울먹이니까. 해가 떠서, 너무 쨍한 해가 떠서 말라 죽어가는 꽃잎을 보고 시들어가는 꽃을 보고 우는 너에게 나는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저 고개를 돌려야 하니까. 등 뒤에서 너를 껴안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으니까 너는 나를 진저리치며 싫어할테니까. 괜찮아, 나는 네가 싫어하는 걸 좋아해. 너는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문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러면 너는 울어줄거니? 끝나버린 내 마음을 보면서, 금방 죽어버리는 내 마음을 보고 울어줄 수 있겠니?

 

 웃지 못한다면 울어달라고. 울지 못한다면 그냥 바라만 봐 달라고. 보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면 그래, 옆에만 있어줘. 이 비가 그칠 때 까지만 그냥 옆에 있어 줘. 인기척을 느낄 수 있게 조금만 옆에 더 있어 줘.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혼자였잖아.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 그러면 너는? 너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테야? "

 

 

 너는 그럴 수 없잖아. 나는 그럴 수 있어도 너는 그럴 수 없잖아, 나는 웃었다,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네가 나 대신 울어줄테니까. 내 몫까지 전부 네가 우니까 나는 울 수 없어. 울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웃고, 너는 울고. 나는 네 몫까지 웃지 못하지만. 조금이라도 너의 몫을 가져갈 수는 없지만. 인간을 사랑하는 네 마음도 조금도, 허락할 수 없지만. 이런 식으로밖에 우리는 닿을 수 없지만. 이제 그 시간도 모두 지나가고 있어. 장마가 끝나가고 있어. 비가 그쳐가고 있어. 이제 너도 그만 울어. 나는 가만히 미소를 거두었다. 내가 웃지 않으면 네가 울지 않을까. 내가 웃지 않을 테니까, 너는 그만 울어. 그렇게 하자. 나는 우는 너를 사랑한 게 아니니까. 울리기 위해서 너를 사랑한 게 아니니까.

 

 

 " 너의 의무를 생각해. "

 

 " 생각하고 있어. 열아. 아주 생각하고 있어. "

 

 

 너를 사랑하는 게 내 의무야. 너는 인간을 사랑하고, 나는 너를 사랑하고. 우리는 그런 식으로 의무가 있어. 네가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면 나 역시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 없으니까 우리는 이렇게 평생 닿을 수 없을 테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둘 뿐이지만 그래서 둘이 서로 마주보고, 서로 극과 극에 서서, 멀리 떨어져서, 서로가 서로의 반대가 될 수 밖에 없으니까. 우리가 셋이었다면, 우리가 넷이었다면. 우리가 다섯, 여섯이었다면. 인간만큼 우리가 많았다면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고 너는 나를 미워하지 않고 우리는 우리가 될 수 있었겠지만 나는 나이고, 너는 너여서 우리는 우리가 될 수 없어서. 그래서. 나는 너를 생각하고 있어. 아주, 아주 생각하고 있어. 오래, 많이, 그리고 정말. 너는 항상 답답해 했고 나는 일부러 너를 답답하게 만든다. 대답을 해 버리면 모든 게 끝나잖아, 열아. 정말 모든 게 끝나버리잖아. 더이상 네가 나에게 묻지 않고 더이상 내가 너에게 대답하지 않게 되잖아. 그러면 정말 모든 게 끝나 버리는 거잖아. 지나가 버리는 거잖아. 열아, 나는 영원히 대답하지 않을 거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우리는 영원히 묻게 되고 영원히 대답을 기다리게 될 거야. 영원히 바라고 영원히 의아해 하게 될거야. 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해야 해, 그래야 마지막까지 네가 나를 생각하게 될 테니까. 나를 이해할 수 없어서 나를 기억하게 될 테니까. 우리는 영원히 그런 식으로 존재해야 하는지도 몰라. 우리는 살아있는 게 아니라 존재하는 거니까. 사라지는 대신 죽을 수 없으니까. 나는 너에게 손을 뻗고, 너는 나를 피해 한 걸음 물러난다. 그래, 우리는 이런 식이니까. 나는 조금 웃고. 아주 조금, 웃고.

 

 

 " 네가 원한다면. "

 

 

 한 번도 네가 원한 대로 된 적 없었지만. 한 번도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았지만. 그럴 수 없었지만.

 

 

 " 너를 사랑하지 않을게. "

 

 

 이 장마가 끝날 때까지. 아주 끝날 때까지.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게. 사랑하지 않을게. 보고 싶어 하지 않을게. 원하지 않을게. 이 장마가 지나고 여름이 지나 겨울이 올 때까지, 그렇게 다시 봄이 오고 여름이 와서 다음 장마가 올 때까지. 나는 너를 기다리지 않을게. 나는 조금 웃고, 마침내 조금 운다.

 

 

 

 

 

   

 '한 치 앞이 보인다면, 한 치 앞을 알 수 있다면 다시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다. 열병은 언젠가 낫고, 흘린 피는 말라버린다고 했던가요. 눈물은 마르지 않고 늘 그 자리에서 다시 샘솟을 뿐입니다.

 

      생각해 보면 눈물은 늘 평이한 세월의 중심을 흘러갔습니다.

      여름날, 나는 당신을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허연. 장마 또는 눈물 中

 

 

  


 

 

 

SERIES

‘창작’ 에피소드 목록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