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유
누구나 기원을 가지고 있다.
※ 허블 사무소 소속 스코시즘 로보 프로스터 2차 창작
※ 개인 해석 및 날조
누구나 기원을 가지고 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는 말과 함께 세상이 태어난 것처럼, 거대한 폭발로 인해 물질이 생겨나고 다양한 화학 반응을 통해 미생물이 발생하여 그것이 진화를 거듭해 생물이 된 것처럼. 누구나 존재하게 된 원인이 있고, 계기가 있고, 이유가 있다. 그러니까 너도 당연히 기원을 가지고 있다. 태초에 너를 만든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혹은 만든 곳이 있었을 것이고, 너에게 의식을 불어넣은 존재가 있었을 것이며, 너로 하여금 너 자신을 자각하고 스스로 생각하여 말하고 행동하게끔 만든 존재가 있을 것이다. 네가 어떤 이유로 여기에 있게 되었든지 여기에 있다는 것은, 그러니까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계기 없이,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정말 난데없이 나타나는 모든 것에도 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모종의 혹은 비밀스러운, 우리가 미처 이해할 수 없는 이유나 원인이 있다.
그러니까 나는 니노 선데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너를 고쳐 주었을 때, 너를 다시 깨워 주었을 때 나는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나는 네가 떠날까 봐 두려웠다. 그 사람이 너를 데리고 그럼 이만 돌아갈게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라고 인사하고 너와 함께 가 버릴까 봐 무서웠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너의 손목에 적혀 있는 번호는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너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게 분명했고, 그 번호로 연락했을 때 나타난 니노 선데이라는 남자가 너를 뚝딱, 깨워 주었으니 적어도 그는 나보다 너에 대해 더 잘 아는 셈이다. 어쩌면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너의 기원과 그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고, 그것이 나에게서 너를 데려갈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너를 무단으로 취득한 셈이었으니까. 조금 거칠게 말한다면 나는 주운 사람이 임자라는 주장을 펼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너를 물건이나 사물, 그러니까 자아나 주체가 없는 대상으로 취급하고 싶지 않았다. 네가 원한다면 너는 떠날 수 있는 것이고, 네가 원한다면 너는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저 부탁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조금 더 머물러 달라든가 계속 여기 있어 달라든가, 며칠만 더 있어 달라든가 하는 부탁, 애원, 호소, 어쨌든. 그것이 거래나 제안이 될 수 없는 까닭은, 네가 여기 머무르는 대가로 내가 치를 수 있는 메리트,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너에게 좋은 부품을 제공해 줄 수 없었고, 너를 고쳐 줄 수 없었다. 너에게 더 좋은 프로그램을 세팅해 줄 수도 없었고 너는 먹거나 마시지 않으니 맛있는 요리를 해 줄 수도 없었다. 너는 특별히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으니 옷을 사 줄 필요도 없었고, 값진 무언가를 지불하여 너를 현혹시킬 수도 없었다. 너는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으니까. 오히려 너는 그런 것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길에 아무렇게나 다리를 뻗고 반쯤은 눕듯이 앉아 있었던 너에게 나는 누울 곳, 잘 곳, 지낼 곳을 제공할 수 있었지만 니노 선데이가 나타났으니 너는 여기보다 더 좋은, 원래의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너는 그 집에서 아주 잠깐 길을 잃고 헤맨 것인지도 모른다. 잠깐 미아가 되었던 너를 내가 아주 잠시 보호하다가 이제 제대로 된 곳에, 원래 있어야 할 곳에 돌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감히 부탁할 수도 제안할 수도 하다못해 떼를 쓸 수도 없었다. 나는 그저 약간 초조하고 약간 망설이고 약간 두려운 시선으로 너와 니노 선데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디서 뭐 하나 했더니.”
“내 맘이야.”
“연락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내 맘이라니까.”
니노 선데이는 로보 프로스터와 가볍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둘이 꽤 친한 사이인가 보다, 하고 짐작했다. 편하게 말하는 것이나 분위기가 그래 보였다. 둘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나는 로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왜 갑자기 일어나지 않았던 건지, 충전은 어떻게 한 건지 충전을 한 건지, 아니면 다른 조치를 취한 건지 어떻게 무엇을 한 것인지 둘은 무슨 관계이고 왜 로보의 손목에 당신과 이어지는 번호가 적혀 있었던 건지 질문할 타이밍을 놓쳤다. 사실, 그런 것을 물어도 되는지 잘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런 것은 굉장히 미묘한 질문이 될 수 있었다. 밝히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냥 아,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밖에 없는 질문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잠자코 둘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았고, 약간 아웅다웅 하듯 대화를 나누던 둘은 문득 나를 떠올린 것처럼 입을 다물고 나를 돌아보았다. 한꺼번에 두 장신이 나를 내려다보자 약간 위압감이 들었다. 나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로보의 표정은 차분한 무표정으로 그대로였지만 니노는 무언가 약간 곤란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궁금한 게 많죠?”
그는 꼭 내 마음을 들여다 본 것처럼 질문했다. 하지만 그 물음이 나에게 질문을 허락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니노 선데이는 조금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어깨를 한 번 으쓱여 보였다.
“전부 다 말해 줄게요, 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일단 소개한다면 저는 얘랑 친구 사이예요.”
“아아.”
“음, 그리고…… 뭐라고 해야 하지. 친구들이 더 있어요.”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말하는 친구들이 누구인지 나는 짐작할 수 없었고, 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니노 선데이는 가볍게 웃으며 설명했다.
“다 같이 지내는, 가족 같은 친구? 친구 같은 가족?”
“그게 그거잖아.”
“그런가?”
로보의 지적에 니노가 다시 웃으면서 아무튼, 하고 말을 이었다.
“그런 사이? 예요. 그래서 로보 비상 연락망에 제가 있었던 거고…….”
보통 비상 연락망을 손목에 적어 놓던가. 다른 번호들도 다른 어딘가에 적혀 있는 건가. 궁금했지만 이번에도 나는 질문하기보다는 경청하는 쪽을 택했다. 니노는 턱을 매만지며 흠, 하고 짧게 고민한 뒤 로보를 돌아보았다.
“여기 계속 있을 거야?”
내 가장 큰 걱정이 니노의 입에서 가볍게 튀어나왔다. 나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로보가 반응하기까지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상대적으로 길게 느껴지는 순간이 지나고, 로보가 입을 열었다.
“일단은.”
“그래? 그럼 난 간다?”
“어.”
니노는 나를 돌아보며 활짝 웃어 보이고는 그대로 작별 인사를 해치웠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그러자마자 성큼 걸음을 옮겨 현관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나는 깜짝 놀라 현관까지 그를 배웅했다. 현관에서 그는 뒤에 따라온 나를 발견하고 잠깐 웃었다. 새삼스럽게도 정말 잘 웃고, 자주 웃고, 환하게 웃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로보가 무척 다르다는 생각도. 니노는 나에게 다시 가볍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한 뒤, 거실에 서 있는 로보에게 연락해~ 크게 말하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 니노 선데이가 떠나자, 집이 약간 우중충해진 기분이 들었다. 밝고 환한 사람이 갑작스럽게 사라져서 그런가, 나는 로보가 여기에 더 머무르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기뻐할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닫힌 현관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로보는 어느새 그가 잠들어 있었던 동안 엉망이 된 집을 정리하고 있었다. 청소기를 돌리기 위해 바닥에 있는 것들을 모두 치우기 시작하는 그를 보고 나는 얼른 다가가 그를 도왔다. 로보 프로스터는 그런 나를 흘끔 바라보았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돕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나는 소파 위로 쿠션을 올려 정리하며 조심스럽게 로보의 눈치를 살피다가 질문했다.
“여기 있을 거야?”
“예.”
“……왜?”
왜? 라는 질문을 꺼내는 것은 망설여졌다. 그렇게 물어보면 너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생각하다가 ‘그렇군요. 여기 있어야 할 이유가 없군요. 그러니 가 보겠습니다.’ 하고 떠날 것 같았다. 나는 너에게 ‘왜’ 라고 묻지 말고, 네가 여기 있어야 할 이유를 잔뜩 만들어 줘야 하는 게 아닌지 오히려 고민이 되었지만 묻지 않을 수는 없었다. 니노라는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로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응시가 좀 길어져서, 나는 당황했다. 내가 당황하든 말든 계속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던 로보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
“…….”
거기에 대고 다시 왜? 라고 묻고 싶었다. 혹시 내 생활력이 형편없게 보여서, 그러니까, 그냥 놔 두면 굶어 죽거나 청소를 하지 않아서 더러운 환경에서 병에 걸려 죽거나 어디에서 사고를 당하거나 아무튼 죽을 것처럼 보이는 걸까. 나는 그 정도는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다. 어느 정도 요리도 할 줄 알고, 로보의 기준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청소도 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식사는 좀 불규칙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굶으면서 지내는 건 아니었고 어느 정도 루틴이라고 할 만한 것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왜? 라고 질문하지 않았고 로보는 거기에 대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기에 변명을 먼저 대뜸 꺼낼 수는 없었다. 로보 프로스터가 청소기를 꺼내 오는 사이 나는 다시 왜? 라고 물어볼까 말까를 고민했고, 그 사이 로보는 청소기의 전원을 켰다. 먼지와 쓰레기를 빨아들이는 청소기 소리가 위잉 하고 울리면서 소음을 일으켰기 때문에 나는 조금 크게 목소리를 돋우어야 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로보는 나를 바라보며 대답하는 대신 청소기를 쥔 손을 계속 움직이며 청소기가 어디를 청소하는지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그가 다시 대답을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가 청소기를 돌리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방 공간 쪽으로 자리를 피했다. 로보는 구석구석, 소파 아래와 의자 아래, 테이블 아래 꼼꼼히 한 군데도 놓치지 않고 청소기를 돌리면서 계속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어떤 프로세스와 연산 과정이 일어났는지 나는 절대로 알 수 없고 짐작할 수도 없지만 로보 프로스터는 마침내 거실에 청소기를 다 돌리고 전원을 끈 뒤 대답했다.
“그냥.”
“…….”
그렇게 고민하고 내놓은 답이 고작 ‘그냥’이라는 것에 나는 허탈감을 느껴야 할지 분노를 느껴야 할지 좀 헷갈렸다. 농담인가? 웃어야 하나? 내가 멍하니 있는 사이 너는 네가 누워 있었던 방에도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냥, 이라는 대답에는 왜? 라는 질문을 다시 던질 수는 없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다는데, 거기에 대고 뭐라고 하겠는가. 그가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여기 머무른다면, 얼마든지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떠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렇게 떠난다 해도 할 말이 없으니까, 나는 너처럼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마 네 프로세스와 연산 과정은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이나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논리보다 훨씬 현명하고 똑똑할 테니까.
하지만 나는 꼭 답을 알아야 하는 질문이 또 있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청소기를 돌리는 방의 문가에 서서 질문했다.
“만약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해?”
너는 이런 일이 무슨 일인지 되묻지 않았다. 네가 잠들어 버린 일, 영영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잠들어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일, 이라고 표현해도 될지 아니면 달리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나는 오히려 네가 되묻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로보는 다시 윙 소리를 내며 먼지를 빨아들이는 청소기를 능숙하게 움직이며 묵묵히 고민하다가 그 방에 청소기를 다 돌리고 나서야 전원을 끄고 대답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그건 사실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어떤 다짐이나 약속이나 맹세일까. 너는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이 한없이 제로에 가깝다고 정확한 사실을 고지하는 걸까, 아니면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겠다고 약속해 주는 걸까, 아니면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해 주는 걸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떠날 거라는 의미일까. 나는 묻고 싶었지만 너는 나를 지나쳐 다시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했고 나는 너를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느꼈다. 청소를 하고 있는 네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자면 너는 오래 아팠다가 간신히 의식을 되찾은 환자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일어나자마자 청소를 하고 있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 부당하다,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사람이 오랜만에 의식을 되찾으면 보통은 축하를 하지 않나. 물론 너는 사람이 아니고 잠시 방전되었다가 다시 충전이 된, 그러니까 어떻게 보자면 스위치를 그냥 껐다가 켠 거나 다름 없는 그런 단순한 사태였을지 몰라도. 네가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말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이유 없이, 혹은 이유를 찾고 싶지 않아서, 나는 너를 축하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축하해 주는 게 좋을까? 네가 먹을 수 없는 케이크를 사 오기에도 그렇고. 단순히 축하해, 한 마디를 던지기에도 그렇고.
그래서 나는 청소하는 너를 두고 조용히 작업실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뭔가 너를 위해 만들어 보면 어떨까, 싶어서. 쌓여 있는 잡동사니를 살펴보며 나는 뭘 만들지도 모르면서 막연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