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기다림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처음이 있으면 마지막이 있는 것처럼
※ 허블 사무소 소속 스코시즘 로보 프로스터 2차 창작
※ 개인 해석 및 날조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처음이 있으면 마지막이 있는 것처럼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 바꿔 말한다면, 시작이 있으려면 끝이 있어야 하고 처음이 있으려면 마지막이 있어야 하듯, 만남이 있으려면 이별이 있어야 한다. 작별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자의에 의한 것이고 이별은 인사를 나누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것이다. 작별 인사는 있지만 이별 인사는 없는 것이 그 때문이다. 우리가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면 그것은 작별이지만, 인사 없이 헤어졌기에 우리는 이별했다. 나에게 그것은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지만 어쩌면 너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순간이 반드시 찾아오고 말 것이라는 진실을. 내가 너무 늦게 알고 만 진실을, 너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에 만들어진 모델은 전력이 부족해질 경우 스스로 충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에너지를 보충하는 기능이 탑재되어 있지만 그 이전의 모델들은 그렇지 못했다. 전력이 거의 다 떨어져 갈 때면 경고 메시지를 띄우거나 알림을 울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면 주인이 그 모델을 충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에너지를 보충해 주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기능이 정지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양한 버전의 모델이 만들어졌고 다양한 모습의 모델이 대부분의 가정이나 직장, 공장, 업소나 가게 등에 배치되었으며 각각의 모델이 언제 나온 모델인지 무슨 버전의 모델인지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저 충실히 맡은 바 역할을 다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했기에, 시간이 갈수록 더 발달된 모델이 나오면서 사람이 챙겨 줄 필요 없이 스스로 자신을 챙기고 돌보는 능력이 추가되었기에. 나중에 가서는 목이나 등 뒤, 팔뚝에 있는 바코드를 지우면 그것이 사람인지 아닌지 분간하는 것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어떤 개체들은 자신의 임무에서 벗어나고자 하였고 어떤 개체들은 그저 쓸모가 없기에 버림받았으며 어떤 개체들은 불가피한 이유에 의해 더 이상 주인과 함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것들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당신이 인간인지 아닌지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니게 되었다. 우연한 계기로 상대방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도 결코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거나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었고 예절이었다.
분명히 존재할 시작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히 시작이 있었다. 로보 프로스터는 그 시작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상대방은 그렇지 못했다. 상대방은 이미 많은 기능이 훼손되고, 망가지고,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노후한 개체였다. 메모리가 상당히 증발했고 그것은 복구할 수 없었으며 신체의 어떤 부분들은 부품이 단종되어 직접 개조하거나 개발한 부품으로 대체해야 했다. 움직이는 것이 크게 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오히려 훼손된 기능들이 겉으로 티가 나지 않았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진 회로. 전력이 다 떨어져도 울리지 않는 경고음과 알림. 사라진 바코드.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떤 개체들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주문 제작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친구를 원하거나 자녀를 원하는 가정 혹은 그 외의 다양한 목적을 위해 일부러 겉으로 인간이 아닌 티가 나지 않도록 정교하게, 특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개체들이 있다고 한다. 어쩌면 상대방도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개체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그래서 부품을 구하기가 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섬세한 탓에 더 쉽게 손상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시작이 있었다. 그래서 로보 프로스터는 이곳에 있었다.
이번에도 이름을 듣지 못했다. 아마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만일 로보 프로스터가 상대방에게 질문했다면 상대방은 당황했을 것이다. 자신에게 이름이 있다는 것을,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변명했을 것이다. 이전의 몇 번 동안 로보 프로스터는 상대방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다양한 유도와 질문과 연상 기법을 사용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회로에서 증발한 메모리는 사람의 영혼과 달리 무의식 같은 게 없어서, 한 번 사라진 데이터는 다시 복구할 수 없어서, 아마 상대방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죽어 버렸을 거리서, 진작에 이 지구에서 사라져 버렸을 거라서 로보 프로스터는 여전히 상대방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다만 아무래도 부를 호칭이 없으면 불편하기에, 맹꽁이라는 이름을 임시로 붙여 주었을 뿐이다. 그것을 별명이나 장난, 농담, 뭐 그런 것으로 여긴 덕분에 상대방은 자신의 이름이 없다는 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몇 주를 버티지 못하고 맹꽁은 다시 잠들었다. 처음에는 1년 정도를 버텼었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배터리가 손상되는 것인지 혹은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인지 그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짧아졌다. 열두 달에서 열 몇 달로, 열 몇 달에서 몇 달로, 몇 달에서 한두 달로, 그리고 이제 며칠이 될 것이다. 맹꽁은 자신이 잠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잠들기 이전의 일도 기억하지 못했다. 맹꽁의 기억은 어느 한 순간에 멈춰 있었다. 마치 단기 기억 상실증 환자처럼 새로운 기억은 저장되지 못하고 예전의 기억은 복구되지 않는다.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사람처럼, 로봇이 아닌 것처럼, 만들어진 게 아닌 것처럼 살아 있는 것처럼 지내던 맹꽁은 어느 날 잠을 청하는 밤 영영 잠들었고 로보 프로스터는 에너지 문제를 금방 진단해낸 뒤 맹꽁을 충전해 주었다. 커스텀으로 만들어진 모델이라 그런지 충전 방법을 찾는 것조차 어려웠지만 어떻게든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 충전되고 난 뒤 눈을 뜬 맹꽁은 로보 프로스터와의 만남을 기억하지 못했다. 맹꽁은 낯선 사람이 집 안에 있는 것에 당황했고, 로보 프로스터의 설명에 혼란스러워 했으며, 과열되었다. 그 과정에서 회로 몇 개가 더 손상되었고 부품 몇 개가 상당히 마모되었다. 로보 프로스터는 이것이 옳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로보 프로스터는, 맹꽁이 잠들면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 우선 아침에 일어나지 않는 맹꽁을 확인한다. 남은 전력을 확인하고, 완전히 충전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를 확인한다. 보통 전부 충전되기까지 사흘에서 나흘 정도가 걸렸지만 최근에는 그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아마 배터리의 성능이 점점 떨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긴 시간을 충전해도 제대로 충전이 되지 않았고, 그래서 깨어 있는 시간도 점점 짧아지고 있는 것일 테다. 그것을 고쳐 주고 싶었지만 자칫하면 섬세하게 연결된 회로나 메모리를 더 상하게 만들 수 있었기에 섣불리 수리하기도 어려웠다. 로보 프로스터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전력을 보충해 주는 일 뿐이었다. 그리고 집 안을 깨끗하게 정리한다. 맹꽁이 깨어 있는 동안 자신이 머물렀던 흔적을 지우고, 모든 것을 원위치로 되돌려 놓고,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말끔하게 만들어 둔 뒤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간다. 멀리 떠나지는 않는다. 맹꽁은 곧 눈을 뜰 것이기 때문이다. 눈을 뜨고, 자신이 잠들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깨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잠들기 전에 하던 일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위를 돌아다니고, 고철 따위의 부품을 줍고, 자신의 작업실로 그것들을 가져가서 무언가를 만들거나 수리하거나 재조립해서 생계를 이어 가는 일을.
로보 프로스터는 그 과정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적당한 골목에서 맹꽁을 기다린다. 튼튼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급격한 일교차나 눈, 비 따위에는 손상되지 않는다. 기다리는 동안 니노 선데이를 비롯한 다른 멤버들이 있는 곳을 잠시 다녀와도 좋겠지만, 다녀오는 사이에 맹꽁이 깨어나면 두 사람의 처음을 재현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로보 프로스터는 맹꽁과의 첫 만남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골목에 주저앉아 가만히 잠든 것처럼 기다리는 자신을 지나치다가 어느 순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때. 그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눈동자의 색깔을 궁금해할 때. 그러다가 손을 뻗어 자신의 눈을 뜨게 만들 때. 그때가 첫 만남이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 끝에 처음으로 마주하는 것이 맹꽁이어야 했다. 맹꽁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채 자신의 일상을 이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로보 프로스터의 존재를 깨닫고 평소와는 다른, 그러니까, 그 자신이 기억하는 평소와 다른 무언가를 인지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첫 만남의 메모리가 이전의 메모리를 덮어 써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라진 메모리는 복구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은 조금, 달라져 버렸다. 우선 맹꽁은 수많은 맹꽁을 만들고 잠들어 버렸다. 온 집안에 가득한 말랑말랑하고 촉촉한, 개구리를 닮은 작은 맹꽁들이 맹, 꽁, 하고 울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원래 상태로 모든 것을 돌려 놓으려면 이 많은 맹꽁들을 모두 하나 하나 잡아서 해체하고 부품을 정리해야 할 것이고 그것은 꽤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 번거로운 일이 될 것이다. 그때 마침 니노 선데이가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니노 선데이는 집 안을 돌아다니는 맹꽁들을 발견하고 우왓, 하고 깜짝 놀랐다.
“이게 다 뭐야?”
“맹꽁.”
“엥?”
맹꽁이 잠들면 로보 프로스터는 니노 선데이에게 연락을 했다. 집을 치우고 원래대로 돌려 놓는 데에도 도움을 좀 받기 위해서였지만 다른 멤버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자신이 돌아가야 하는지 다른 해야 할 일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니노 선데이는 로보 프로스터가 멤버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길 은근히 바라는 눈치였지만, 로보 프로스터에게 강요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로보 프로스터는 지금까지 계속 맹꽁이 잠들면 니노 선데이의 도움을 받아 집을 정리하고, 멤버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대신 이 근처를 서성이다가 골목에 앉아 가만히 맹꽁이 깨어나기를 기다릴 수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도움을 받기 위해 부른 것이지만 니노 선데이 역시 수없이 많은 맹꽁들을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치울 수 없겠는데?”
“…….”
로보 프로스터의 눈썹이 조금 찡그려졌다. 누군가 보면 화를 내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깊은 고민에 잠긴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니노 선데이는 로보 프로스터에게서 시선을 돌려 맹꽁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맹꽁은 니노 선데이의 손 안에서 맹, 하고 울었다.
“제법 귀엽기도 하고. 그냥 놔 두면 어때?”
“…….”
여전히 로보 프로스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맹꽁이 일어나서 이 수많은 맹꽁을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측할 수 없었다. 또 과부하가 일어나거나 메모리가 소실되는 등의 기능 이상이 발생해 이번에는 정말로 영영 잠들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는 맹맹거리며 돌아다니는 이 작은 초록색 로봇들을 정리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겠지만, 니노 선데이의 말대로 로보 프로스터는 자신이 맹꽁들을 치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럴 수 없었다. 지금까지 맹꽁이 몇십 번 몇백 번이나 잠들고 다시 깨어나면서 처음으로 일어난 변화이기도 했다. 이것은 어떤, 무언가의 징조일지도 모른다. 좋은 방향의 징조인지 나쁜 방향의 징조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맹꽁은 수습 불가능할 정도로 무언가를 벌이거나, 무언가를 만들거나, 무언가를 망치지 않았다. 언제나와 비슷하게 쳇바퀴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잠들었고, 그런 하루를 보내다가 어느 순간 영영 깨어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사소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이 변화가 어떤 결과를 불러오게 될지 로보 프로스터는 알 수 없었고, 그래서 알고 싶었다.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맹꽁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더 많은 맹꽁이 있으니 괜찮을 것도 같았다. 이 무수히 많은 맹꽁들과 함께 맹꽁이 일어나는 것을 기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저 골목 밖에 앉아 또 다시 우연을 가장하여 재회하는 것보다, 이번에는 집 안에서 가만히 기다려도 될지도 모른다. 변화가 무엇을 불러올지 알 수는 없어도, 지금 이것을 없던 일로 만든다면 두 번 다시 이런 변화는 찾아오지 않을 것도 같았다. 어쩌면 기적 같은 게 일어나서 소실되었던 메모리가 복구될지도 모른다. 로보 프로스터는 아직 맹꽁의 모든 기능을 정확히 다 알지 못했기 때문에, 우습게도, 무지하기 때문에 막연히 바랄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아무것도 바랄 수 없다. 전지한 신은 그래서 아무런 소원이나 바람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기도를 받는 존재인 것이다. 기도를 올리는 존재가 아니라. 모른다는 것은 때로 축복이 되기도 한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맹꽁이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것처럼.
어느 날, 맹꽁은 아무리 충전해도 영영 눈을 뜨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맹꽁은 자신이 잠들었다는 사실조차, 기능이 정지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청소나 도와.”
“네에.”
니노 선데이의 도움으로 돌아다니는 맹꽁들을 피해 집을 청소한 뒤, 니노 선데이는 돌아갔다. 로보 프로스터는 맹꽁들과 함께 집 안에 남았다. 원래대로라면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 골목을 서성여야겠지만 맹꽁들이 있는 이상, 이곳에 남아 설명을 해 줄 누군가가 필요할 것 같았다. 로보 프로스터 외에는 아무도 이 맹꽁들에 대해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설명을 듣지 못하면 맹꽁은 더욱 혼란스러워 할 테니, 이것은 맹꽁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동시에, 로보 프로스터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어떻게 될까. 어쩌면 메모리가 더욱 손상되어 바로 방금의 일도 기억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에는 기능이 완전히 정지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어쩌면. 잃어버린 메모리가 복구될지도 모른다. 자신의 이름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로보 프로스터와의 몇 백 번이나 반복된 만남을 기억해 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때는 인사를 해야지. 기다렸다고. 로보 프로스터는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가만히 잠든 것처럼 앉아 있는 그의 주위로 맹꽁들이 모였다. 그의 무릎과 어깨, 손 위에 각자 자리를 잡은 맹꽁들도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작별도 이별도 아닌, 기다림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