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하고 모호한
※ 허블 사무소 소속 스코시즘 로보 프로스터 2차 창작
※ 개인 해석 및 날조
나 어제 집 가는 길에 그 선배 봤다.
왜, 그 선배. 밴드부에서 드럼 하는. 키 크고 잘생기고……. 맞아. 이름이 로보? 였지.
어제 너무 더워서 원래 집 가는 길 말고 좀 더 시원한 길로 돌아서 갔거든. 원래 집 가는 길에는 그늘이 하나도 없어서 그늘 많은 길로 가고 있었거든? 근데 그 선배가 앞에 가고 있는 거야. 뒷모습만 봐도 알겠던데? 그렇게 키 큰 사람 우리 학교에 별로 없잖아. 다리가 길어서 그런가 엄청 잘 걷더라. 근데 엄청 더워하는 것 같았어. 계속 손풍기 들고 있던데. 아무튼, 그 선배가 앞에서 걷고 있길래 아 이 길이 저 선배 집 가는 길이구나 하고 있었거든. 나도 더워서 정신 없었고 굳이 불러서 인사할 사이는 아니라서 그냥, 걷고 있었는데 그 선배가 갑자기 멈추는 거야. 뭐지? 싶어서 봤더니 옆을 쳐다보고 있더라? 그래서 나도 뭐 있나 봤지. 근데 그 담장 위로 길고양이가 걸어가고 있는 거야. 턱시도였어. 나 고양이 엄청 좋아하잖아. 근데 고양이들은 나 싫어하더라. 아무튼 그 선배가 고양이를 빤히 보고 있는 거야. 그러고 뭐라고 했는지 알아?
―너 언제까지 따라올래?
와, 나 진짜 순간 나한테 하는 말인 줄 알고. 따라가는 거 아니라고 막 변명할 뻔 했는데 그 고양이 보고 하는 말이더라고. 몰랐는데 그 선배 걷는 옆에서 계속 담장 따라 걷고 있었나 봐. 대답도 하더라? 야옹 하고. 그래서 그 선배가 그만 따라오라고, 집 가라고, 덥다고, 막 고양이한테 그러는 거 있지? 근데 고양이가 그러잖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앉아서 앞발이나 좀 할짝이더니 다시 야옹 그러더라고. 그러니까 그 선배가 한숨 쉬고 다시 걷는데, 고양이가 계속 나란히 걷는 거야. 진짜 신기했다. 귀엽기도 하고. 나 길고양이가 사람 그렇게 잘 따르는 거 처음 봤잖아. 밥 챙겨 주는 고양이인가? 그런데 그 선배랑 고양이랑 뭔가 안 어울리는 듯 어울리잖아. 그 선배도 좀 고양이 같은 면이 있지 않아? 뭔가 조용히 돌아다니고, 아무 생각 없이 있으면 옆으로 슥 지나가고. 인상도 약간 날카롭고. 어? 날카로운 편은 아닌가……. 근데 좀 무섭지 않아? 난 그 선배 웃는 얼굴 한 번도 못 본 것 같아. 웃으면 진짜 잘생겼다던데.
아무튼, 그렇게 계속 걷다 보니까 그 선배가 또 다시 걸음을 멈추는 거야. 그리고 뭐 했는지 알아? 가방을 한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었는데, 그 가방을 바닥에 내리고 뭘 주섬주섬 꺼내는 거야. 그리고 츄르 꺼내더라. 진짜 빵 터질 뻔 했어. 아니 그 선배가 츄르를 들고 다니나 봐. 그러니까 고양이가 그렇게 쫓아갔나? 나도 괜히 같이 멈춰서 좀 떨어져서 보고 있는데, 고양이한테 츄르 짜주면서 막 혼자 뭐라고 뭐라고 하는 거 있지. 날이 덥다고. 물 많이 마시라고. 자기 맨날 츄르 들고 다니는 거 아니라고. 오늘 츄르 없었으면 어쩔 뻔 했냐고. 고양이한테 잔소리하는 사람 처음 봤어. 고양이? 그냥 츄르 받아먹기에 바쁘던데. 엄청 귀여웠어. 막 혀 낼름낼름 하면서 앞발로 츄르 주는 손 붙잡아 당기고. 엄청 맛있게 먹더라. 그 선배가 키우는 고양이 같았어.
아, 진짜? 원래도 학교 뒤에서 고양이 밥 챙겨 줘? 진짜 의외다.
밥그릇은 본 적 있지. 경비 아저씨가 챙겨 주는 줄.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아, 진짜? 일부러 찾아가는 애들도 있어? 신기하다. 인기 좋아? 아……. 잘생기긴 했지. 진짜 잘생겼고…… 맞아, 목소리도 좋잖아. 저번에 영어 스피치 대회에서 그 선배가 금상 받고 그때 전교생이 목소리 대박이라고 난리 났었잖아. 그거 촬영한 거 영상 풀어 달라고 막 건의하는 애들도 있던데. 근데 밴드부에서 보컬은 따로 있다면서. 응. 밴드부가 몇 명이었지? 다섯 명? 다 노래 잘 해? 오……. 저번 축제 때 공연 취소된 거 아쉽네. 궁금한데.
아니,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학년도 다르고 동아리도 다르고 뭐 마주칠 일도 없으니까 잘 모르는 거지. 그 선배 3학년이잖아? 그러니까 나랑 마주칠 일이 뭐가 있어. 어제도 그냥 우연히 길이 겹친 거고……. 응? 그냥 보고 있었지. 고양이 귀여워서. 그 선배도 의외라서 귀여웠고.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고양이 귀여우니까 계속 보고 있었던 거지 뭐. 나도 더워서 좀 쉬고 싶었고. 숨어 있진 않았고 그냥 그늘 밑에 서 있었는데. 츄르 다 주니까 고양이한테 이제 가라고 하고 계속 걷던데? 근데 고양이 계속 따라갔어. 꼬리도 바짝 세우고 더 신나서 따라가는 것 같던데. 엄청 귀여웠어. 나도 앞으로 츄르 같은 거 잔뜩 들고 다닐까 봐. 고양이 만나면 주게. 그 선배는 몇 개씩 들고 다닐까? 그냥 츄르 말고 건강한 츄르가 따로 있어? 아……. 수분 보충 중요하지. 맞아. 고양이들 물 잘 안 마시잖아. 그럼 물 들고 다니는 게 더 낫나? 아무튼, 어제 그랬다고. 신기했어.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냥 그 선배의 그런 모습이 되게 의외여서 신기했던 거지. 아니라니까…….
근데 인기 많을 것 같긴 해. 키 크고 잘생겼고 목소리도 좋고. 응. 발렌타인 데이? 와, 진짜? 단 거 안 좋아한다는 건 다들 어떻게 알았대. 근데 밴드부 하는 사람들 다 그럴 것 같은데? 서랍에 초콜릿 터지고 고백 엄청 받고. 아니, 그냥 얼굴만 알아. 이름은 잘 모르고……. 니노? 아아. 3학년이시구나. 오토, 이로, 코요. 알았어, 알았어. 이제 외워 둘게. 아니, 진짜 몰랐다니까. 나는 밴드나 공연 이런 거 잘 모르니까. 나랑 인연도 없고. 난 그냥 책 정리나 하고 책 반납 안 한 애들 찾아가서 독촉하고 그러지. 근데 니노 그 사람은 몇 번 본 적 있어. 도서관에 와서 책 많이 빌려가던데. 저번에 장발장 빌려가더라? 너는 읽었냐, 장발장?
말 돌리는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하긴 하잖아. 뭐 하는 사람인지 좀 신기하기도 하고 엄청 의외인 면도 많은 것 같고. 댄스 동아리? 춤을 그렇게 잘 춰? 농구부에서도 엄청 스카웃 들어갈 것 같은데. 키가 크니까. 손이 클 것 같긴 하더라. 키가 크니까 손도 크겠지. 설렘 포인트가 뭐야……. 드럼 치는 거랑 손 크기는 상관 없잖아. 글쎄……. 드럼 멋있긴 하지. 드럼 없으면 안 되잖아. 뭐든 하나라도 없으면 밴드가 아니긴 하지. 근데 밴드부 이번에 입부하려는 사람은 있대? 모르겠는데. 도서부는 그냥 전이랑 똑같았어. 원래 조용한 애들이 많이 오잖아. 가끔 이상한 애들 하나씩 섞여 있긴 하지만……. 하고 싶으면 네가 입부 신청서 넣어. 왜 나한테 하라 그래. 웃긴다. 아니, 그냥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도 아니고 나만 일방적으로 보고 있었던 건데 무슨 인연이야. 이름도 잘 모르는데. 알았어, 알았어. 로보 프로스터. 외워둘게. 가끔 보면 아이돌부보다 밴드부가 더 아이돌 같다니까. 진짜 축제 때 공연 했어야 했는데. 다시 생각해도 아쉽다.
아니, 진짜 몇 번 말해. 좋아하는 거 아니라고. 반한 거 아니라니까?
잘생겼고 키 크니까 눈이 가는 거야 당연하지. 워낙 유명하니까 얼굴은 알고. 아, 뭐야. 몰아가지 마. 이상한 소문 내면 그 선배한테도 실례잖아. 그 선배는 내가 누군지도 모를 텐데? 내가 몇 학년 몇 반인지…… 아니, 내가 있다는 것도 모를걸? 대화 해 본 적도 없으니까. 계속 얘기하는 건 네가 계속 물어보니까 그렇지. 다른 얘기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진짜다? ……아, 니노 선배랑 친해? 그것도 의외다. 둘이 완전 정 반대 스타일인 것 같은데. 원래 성격 다른 사람끼리 더 잘 친해진대. 몰라. 내가 안 하거나 모르는 걸 상대방이 해서 그런가? 근데 니노 선배는 옆에 있으면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응. 보컬이 막내? 오…… 그것도 의외인데. 특별 공연이라도 해주면 좋겠다. 반대하는 사람 없을 텐데. 아, 선생님들 허락 받기가 힘든가. 아침에 조회하는 시간에 밴드부 공연 보는 게 더 재밌을 텐데. 그치.
감긴다는 게 무슨 뜻이야. 너 계속 그런 식으로 몰아갈래?
아니,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좋아해. 얼굴? 뭐 첫눈에 반하는 사람도 있기야 하겠지만 나는 아니거든? 그러는 너는 연애 해본 적 있냐? 뭐야, 지도 없으면서. 그리고 난 그렇게 인기 많은 사람 좋아하고 싶지 않아. 경쟁자가 많은 거잖아. 나보다 더 예쁘고 괜찮은 애들이 많을 텐데 그 선배가 나한테 관심을 왜 가져. 뭐…… 그치. 아이돌 좋아하듯 좋아할 수는 있겠지. 그냥 팬 느낌으로? 근데 그러면 그 선배 졸업할 때 난리 나겠다. 대학 쫓아가는 애도 생기는 거 아냐? 아, 내 얘기 아니라니까!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왜 그렇게 극단적이야? 왜 좋아하는 게 아니면 싫어하는 게 되는 건데?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거지. 반한 게 아니라, 팬 느낌으로 관심이 있는……. 아, 그런 관심이 아니라! 너 드라마 좀 그만 봐라. 웹소설도. 인사를 왜 해. ……오늘도 그 길로 집에 가긴 할 건데. 날이 더워서 그늘 많은 길로 가는 거지 그 선배 보려고 가는 게 아니라니까? 뭐야, 그 표정은. 짜증 나네? 그러면 네가 그 길로 가 보든가. 내가 아니라 네가 그 선배 좋아하는 거 같은데. 아…… 다른 사람 누군데? 너야말로 고백해라. 자기도 안 하면서 왜 나한테 난리야. 좋아하는 거 아니라니까. 진짜 그런 감정은 아니야. 그냥…… 잘생긴 사람 보고 있으면 좋잖아. 연예인이나 영화 배우 보면 좋은 것처럼. 그때 시집 낭독했던 거 좋았지. 응. 녹음했으면 계속 들었을 것 같아. 근데 평소 목소리가 그런 거지? 신기하다. 그렇게 낮은 목소리인데 엄청 편안하잖아. 듣기도 좋고. 목소리 낮으면서 노래 잘 하는 사람 드문데 그것도 신기하고. 노래 부르는 거 궁금하긴 하다.
네가 자꾸 그러니까 나도 헷갈린다. 세뇌냐? 뭐냐?
근데 대화도 한 번 안 해 본 사람을 좋아할 수 있어? 모르겠어……. 오늘도 마주치면 인사라도 해 볼까. ……이상한 사람 취급 당하면 어떡해? 안 그래도 그 선배한테는 이상한 애들 많이 꼬일 것 같은데. 난 그런 애들이랑 같은 취급 받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진짜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내가 애매하게 좋아하는 게 실례되는 일이잖아. 글쎄…… 그냥 좀…… 애매해. 계속 얘기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됐어, 어차피 3학년이라 바쁠 텐데. 딱히 연애나 그런 거에 관심 있는 사람 같지도 않고. 애초에 그 정도로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니까. 애매하다고 했잖아. 글쎄, 밴드부 공연 있으면 보러 가고 싶지. 공연 끝나고? 너무 실례인 것 같은데……. 됐어. 근데 고양이가 잘 따르는 건 신기해서 비결 물어보고 싶긴 해. 역시 밥을 챙겨 줘야 하나? 물도 챙겨 줘야지. 물에 츄르 약간 타 주면 잘 먹는다던데.
내가 말했지만 그 선배 보려고 일부러 그 길로 돌아서 집에 가는 게 아니라 날이 더우니까……. 아오. 싫어, 안 해. 무슨 첫사랑이야. 아니거든. 너나 고백해. 난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 좋……긴 하지. 좋긴 한데, 그런 좋음이 아니라. 아, 몰라. 설명하려면 복잡해. 말해도 모를 걸. 됐어. 뭘 설명해. ……. 싫은 건 아니지만……. 당연히 모르지. 내가 그 선배 마음을 어떻게 알아. 모르지, 다른 좋아하는 사람 있을지도. 사귀는 사람 있을지도 모르고. 없는 게 좀 이상하지 않아? 오히려. 그렇지? 그래. 그러니까 고백이니 뭐니 자꾸 몰아붙이지 마.
……그냥 그런 식으로 뭉뚱그려지는 게 싫기도 하고.
응?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 종 치겠다. 얼른 가. 어. 이따 봐.
…….
……그 길로 가면 또 볼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