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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유령

능사. 일상로그

By 민트박하 | 2026.05.14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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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새벽은…… 무슨 수를 써도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서, 결국 한참 눈을 감은 채로 침대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패배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키게 된다.


  검은색 실크로 일부러 맞춤 주문 제작한 침대는 혼자 쓰기에는 지나치게 넓지만 사치와 허영에는 제격이다. 몇 번이나 옆으로 굴러도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을 그 침대가 오늘은 지나치게 황량하고 차갑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채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한다. 짙은 어둠이 깔려 있던 실내가 점점 선명해진다. 커다란 책상 하나와 의자 하나. 책상 위에는 노트북과 화분, 책꽂이 그리고 패드가 놓여 있고 필기구가 담긴 필통도 하나 있다. 전신 거울 옆에는 화장대가, 다른 쪽 벽에는 드레스룸으로 통하는 문이, 그 맞은편에 거실로 나가는 문이 있다. 그렇게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방을 한 바퀴 둘러보지만, 특별히 무언가를 찾고 있는 건 아니다.

  얇은 잠옷을 걸친 창백한 몸이 검은 침구 사이로 슬며시 빠져나온다. 마치 뱀처럼 소리 없이 움직이는 하얀 몸. 조명 스위치를 올리지도 않고 흐느적거리며 걷는다. 식은 바닥에 미지근한 발이 닿으며 타박거리는 소리가 난다. 침대 머리맡에서 똬리를 틀고 함께 잠들어 있던 검은 뱀이 고개를 들고 주인을 찾는다. 주인은 이미 방문을 열고 있다.



  거실에는 베란다로 통하는, 커다란 통유리창이 있어 그곳으로 달빛이 비쳐 들어온다. 거실 역시 혼자 사는 곳 치고는 지나치게 넓다. 간혹 이곳에서는 목소리가 왕왕 울리기도 한다. 거실의 가구들도 흑백 모노톤으로 간결하고 심플한 편인데, 검은 소파에 하얀 쿠션, 유리로 된 커피 테이블, 바닥에는 검은 러그. 바닥은 대리석처럼 하얗다. 미지근한 발은 그저 걷는다. 타박거리고 휘청거리며 걷던 발이 잠깐 머뭇거린다. 이제야,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듯 움찔 걸음을 옮겼다가도 다시 거둔다. 그사이 검은 뱀이 주인을 찾아 침실에서 기어 나온다.

  뱀의 배가 바닥을 기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실내가 지나치게 고요하여 주인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검게 구불거리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움직였고, 새하얗고 창백한 얼굴이 뱀을 내려다보았다. 뱀은 주인의 발치에서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 눈을 마주했다. 녹색 눈동자와 녹색 눈동자가 마주쳤고, 주인은 흐느적 허리를 숙이며 가느다란 팔을 아래로 뻗어 주었다. 검은 뱀은 흰 팔을 감아 올라갔고,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과 더불어 마치 어둠에 먹히고 있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익숙하게 주인의 어깨와 목에 몸을 걸치고 자리를 잡은 검은 뱀은, 작은 뺨과 이마를 주인의 뺨에 비볐다. 뱀은 변온동물이고, 새벽의 공기는 차가웠기에 평소보다 움직임이 많이 둔했으며 머리 회전도 느렸다. 뱀은 주인이 왜 자지 않고 침대에서 나와 거실을 방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뱀은 질문했고, 침대로 돌아갈 것을 제안했지만 주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뱀의 주인도 어느새인가 뱀과 같아져 버려서, 움직임이 둔해지고 머리 회전이 느려졌는지도 모른다. 침대로 돌아가서 포근한 이불 속에서 잠을 청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게 되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검은 뱀이 미심쩍고 불안한 눈으로 주인을 바라보고 있을 때, 주인의 마른 손이 느릿하게 올라왔다. 주인은 능숙하게 뱀의 턱을 긁어 주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주인의 손은 뱀의 몸보다 따스한 체온을 가지고 있어서, 뱀은 그 손에 마음껏 머리를 부볐다. 주인은 뱀의 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마침내 목적지를 정한 듯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은 거실 옆에 있는 넓은 베란다였다.

  유리로 된 미닫이문을 열자,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거실로 들이닥쳤다. 뱀은 몸을 웅크리며 주인의 몸에 더욱 찰싹 달라붙었고, 주인은 그런 뱀을 달래는 것처럼 손을 넓게 펼쳐 검은 뱀의 몸을 쓰다듬고 어루만져 주었다. 베란다의 타일은 차가웠고, 그래서 발이 시렸다. 그래도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베란다의 유리창도 열어젖혔다. 순식간에 서늘한 바람이 실내를 향해 들어왔고, 뱀은 침실에서 나온 것을 살짝 후회했다. 뱀은 주인에게 침실로 돌아가자고 다시 제안했지만, 주인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새하얀 팔을 베란다 난간 위에 올리고 몸을 기댄다. 멀거니 하늘을 응시한다. 그의 집은 꽤 높은 층이어서, 시야에 거의 가리는 것이 없이 하늘을 바로 볼 수 있었다. 약간 노란 은빛 달의 모양은 애매하게 일그러진 원이었는데, 구름에 가려지진 않아서 꽤 선명했다. 그 달을 빤히 올려다보면서 그는 잠시 한숨을 뱉었다. 희미하게 입김이 새어 나왔다. 봄이 오긴 했어도, 새벽은 아직 너무 추웠다.


  무척이나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잠시 그대로 물끄러미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잠이 오지 않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잘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방법을 쓰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잠들 수 없었다. 그게, 약간 우스웠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아니, 나는…… 그런 사람인가. 모르겠네.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내가 누구더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모호한 밤이면, 그는 누구에게 무엇으로도 불리지 않으며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창백한 유령이 된다. 이름이 있고 또 다른 이름도 있었지만 불러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게 이름이다. 세상에 오직 홀로 남겨져 있다면, 너와 나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면 굳이 이름이라는 게 필요할까. 다른 누구에게 무언가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없다면, 다른 무엇에 이름을 붙이는 게 필요할까.


  갑자기 문득, 너무 춥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일상과 비일상을 잘 구분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이 두 개였기에, 일상에서 쓰이는 이름과 비일상에서 쓰이는 이름을 각각 붙여 놓았기에 언커먼으로서 활약하는 그는 지금 비일상을 살아가고 있었고, 일상의 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비일상이 계속 이어진다면, 그것을 비일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이 매일 어긋나 있다면, 어긋난 그것이 바로 일상 아닐까.


  그러니까, 나는…….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언커먼이라는 말은 우습다. 언젠가는 뒤집히겠지. 이능력이 없는 자들이 언커먼이 되고, 이능력이 있는 게 당연해지겠지. 어쩌면 균열과 던전도 일상이 될지 모른다. 더 많은 균열과 던전이 발생할지도 모르고…… 지금 비일상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이 나중에 가서는 일상이 되겠지.

  경계선을 넘어간다. 아주 두껍고, 너무 두꺼워서 마치 면처럼 느껴지는 경계선을 하염없이 걸어서 넘어간다.


  나는…… 누구더라. 어느 쪽이 나였지. 그는 이마를 짚었다. 머리를 틀어 올려 단정히 묶고, 눈화장을 옅게 하고, 약간 더 단정한 차림을 하면 그는 일상을 보낼 수 있게 되고, 머리를 풀어 내리고 눈화장을 짙고 어둡게 하고, 초커를 하고 목에 뱀을 두르면 그는 비일상을 보내게 된다. 그런데 요즘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일상을 보낼 수 있었던 게, 점차 뜸해져서 두 달에 한 번 정도가 되더니, 이제는 먼저 연락하기도 무서워져서…….


  이제 그건 내가 아닌 것 같기도 해. 지금이…… 진짜 나인지도 몰라.


  이런 걸 바라 왔었나……? 그는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분명 무언가를 바랐기 때문에 또 다른 이름을 만들어 비일상에 붙여 주었고, 비일상과 일상을 구분하여 지냈고, 일상의 그는 비일상의 그와 조금 달랐다. 조금? 많이. 어쩌면 아주? 혹은 전혀. 그런데 이제는 잘 모르겠네…….


  내가 누구였더라…….


  그는 뱀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물어보았다. 검은 뱀은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는 대답했다. 뱀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는데, 뱀의 주인이라는 말뿐이었다. 그는 그리고? 하며 다른 대답을 찾았는데, 뱀은 이어서 가장 소중한 친구, 라고 대답해 주었다. 물론 기쁜 대답이었지만, 그가 원한 대답은 아니었고, 사실 어느 쪽으로 대답했든 그는 만족할 수 없었을 테다. 그는 그냥 힘없이 웃었다.



  모호한 밤에는 잠이 오지 않는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화장도 하지 않은, 잠 못 드는 새벽의 나는 누구일까. 그는 자신의 이름을 모두 잊는다. 그리고 잠을 청하기 위해 침실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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