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개인적이고 사적인
By 민트박하 | 2026.06.0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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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슬픔이 덮쳐 올 때 찾게 되는 사람. 하지만 정작 바로 앞에서 눈을 마주하면 모든 것을 삼켜 버리게 되는, 그래서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는 사람. 그럼에도, 곁에 있어 주는 사람. 아무 말 못 하고 젖은 눈으로 입술부터 맞댈 때 말없이 안아주며 함께 입 맞춰 주는 사람. 나쁜 남자보다 더 위험하고 나빠, 의존하게 만드니까. 여기라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해 버리게 만드니까.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를 원하게 만드니까. 정신 차려 보니 흠뻑 젖어 있었다는 흔한 비유처럼 달콤해서, 입에 맞아서, 포근해서 계속 찾게 되고 그러다가 결국에는 없으면 견딜 수 없게 만들어. 정신을 차려 보면 이미 한참 늦은 거야. 돌아가기엔 아쉽고, 더 나아가기엔 무서워. 아무 확신 없이 기대가 부풀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내가 당신의 왼손 약지에 있는 결혼반지를 뻔히 알면서도 손가락을 얽어올 때 왜 내 손을 떨쳐내지 않았어?
능사는, 그 여배우는 그런대로 잘 나가는 배우였다. 캐릭터가 워낙 뚜렷해 드라마나 영화에서 흥행 보증 수표라고 불리기도 했고, 팬만큼 안티도 많아 화제성으로는 누구 못지 않았다. 하루에 한 번은 꼭 연예 면 기사에 이름이 실렸고 저열한 관심을 유발하는 찌라시에도 심심찮게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럼에도 연기력만큼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소속사에서도 꽤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계약을 해지하지 않고 있었다. 젊은 나이임에도 캐릭터의 입체적인 면을 살려 순식간에 몰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장래가 기대되는 배우라는 평을 들은 적도 있었기에 사생활 문제만 빼고 본다면 능사는, 그 여자는 나름대로 안정적인 커리어를 쌓으면서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여자였다.
누군가는 남자가 그 여자에게 질려 버린 거라고 했다. 온갖 추잡한 소문들이 떠돌아다니는 여자를 누가 좋아하겠냐고. 믿을 수 있겠냐고. 누군가는 처음부터 돈을 노리고 한 결혼이라고 확신했다. 남자가 어마어마한 재벌 3세가 분명하다고. 우리가 잘 아는 그 기업의 숨겨진 아들이라고. 누군가는 여자의 내연 관계가 발각된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것도 하나, 둘 정도가 아닌 양 손가락을 모두 꼽아도 부족할 정도로 남자가 넘쳐났다고 추측했다. 누군가는, 집안의 반대를 거스르고 억지로 한 결혼이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다고 했고 누군가는, 처음부터 정략적인 결혼이었을 거라고 했다. 또 누군가는 남자가 쓰레기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여자가 구제불능이라고, 누군가는, 그리고 누군가는.
한이현이 능사를 만난 것은 그런 소문이 떠돌기 한참 전의 일이었다. 정확히는 약 3개월 정도 전이었다. 합의 이혼을 위해 한이현의 사무실을 찾은 능사는 능사라는 이름이 아닌 연하민이라는 본명을 썼다. 매니저나 소속사를 통해 연락한 것도 아니었다. 이건 아주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사무실을 처음 방문했을 때 능사는 평소의 스크린, 브라운관, 인터뷰 등 매체에 비춰지는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갔다. 안녕, 자기야. 문이 열리고 나타난 얼굴을 향해 느릿하게 웃으면서 건넨 인사는 변호사에게도 부적절한 것은 물론 연상의 남성에게도 그렇게 예의 바른 인사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능사는 아마 상대방이 자신의 이런 모습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또 예상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사람들이, 대중이 흔히 접하는 능사는 이런 모습이었으니까.
본명을 거의 밝히지 않고 다녔기에 한이현이라는 변호사는 눈앞의 능사와 전화로 상담을 문의한 연하민을 곧장 매치시키지는 못했지만 곧 이해했다는 듯 작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능사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뒤로 물러나며 문을 조금 더 열었다.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아 서로의 명함을 주고받은 뒤 본격적인 상담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능사는 능사였다. 상담 초반에도 능사는, 능사였다. 하염없이 가볍고 관심 없는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알 듯 모를 듯한 표정과 애매한 말로 상대방으로 하여금 오해하도록 만드는 의뭉스러운 태도. 변호사의 의뢰인으로는 적절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한이현은 능사의 언행을 지적하거나 주의를 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필요한 인적사항을 물어보고, 대략적인 상황을 전해 듣고, 능사와 배우자의 현재 상태 등을 체크한 뒤 어느 방향으로 이혼을 진행하면 좋을지를 단정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안내했다. 상담은 짧게 끝났다. 능사가 스케줄이 바쁘다고 했기 때문에. 물론 거짓말이었고, 한이현은 상담 시간에 따른 비용을 안내했다. 능사는 일시불로 결제한 뒤 다음 상담을 예약했다.
두 번째까지는 능사였다. 세 번째까지도, 그런대로 능사였다. 네 번째에서는 확실하지 않았다. 네 번째 상담에 나타난 사람은 능사였지만 상담을 마치고 나간 사람은 연하민이었다.
이해할 수 없어, 라고 말했다. 그 목소리는 연하민의 것이었다. 빠르지 않고, 높지 않고, 들떠 있지 않고, 경쾌하지 않은 탁한 목소리. 그 여자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이해할 수 없어.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오는 짓눌린 목소리. 이해하고 싶지 않아. 젖은 숨결. 한이현은 묵묵히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다가 펜을 내려놓고 손수건을 테이블 위로 밀어 놓았다. 그 여자는 아직 그것을 보지 못했다. 손가락과 손등을 타고 손목으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 여자는 작게 흐느꼈다. —사랑한다고 했는데. 분명히 그렇게 말했는데. 술을 좀 마시고 온 것 같았다. 회식이 있었는지 사무실로 들어올 때 능사는 약간 취해 얼굴이 붉고 한창 들떠 있었다. 상담을 다음으로 미룰까 싶기도 했는데, 우리 변호사님 보고 싶어서. 찡긋 윙크하며 성큼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익숙하게 테이블 앞에 앉고 시원한 물 한 잔만 줄래요? 라고 말하는 그 여자는 분명히 능사였다. 능사였었다.
“난 모르겠어…… 알고 싶지도 않아. 왜?”
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었기에 한이현은 입을 열지 않았다. 특별히 할 말도 없었다. 물을 마시고 난 뒤에도 잠시 동안은 능사였다. 하지만 곧 취기가 다시 올라오면서 한이현의 질문에 답변이 느려졌고 눈의 초점이 풀리며 볼이 다시 붉어졌다. 웃음기가 사라지면서 한이현은 그 어느 매체에서도 볼 수 없었던 능사의 맨 얼굴을 봤다. 처참하게 가라앉은 우울의 찌꺼기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눈물 자국으로 얼룩덜룩한 그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녹색 눈동자가 허공을 더듬었다. 꼭 그곳에 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왜 사랑하는데 전부일 수 없는 거야?”
지금껏 능사는 명확한 이혼 사유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저 남편도 자신도 이혼을 원하고 있으며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다는 요지의 말을 되풀이했을 뿐이다. 연하민이 되어서야 간신히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 사랑하면, 사랑하면 전부여야 하는 거 아니야? 사랑하는데? 만취한 취객의 행패나 다름없는 모습에도 한이현은 담담했다. 테이블 위에 엎드린 채 울먹이는 연하민의 머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담요를 가져와 어깨 위를 덮어 주고 차가운 물 대신 따스한 차를 우려 왔다.
연하민은 한참을 더 울고 난 뒤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옆에 놓여 있는 차 한 잔과 자신의 어깨를 덮은 담요를 한 번씩 바라보고는 긴 한숨을 뱉었다. 붉게 부어오른 눈을 손등으로 비비고는 가만히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을 기다려 주고 있었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흐릿하던 초점이 조금씩 돌아오면서 울음은 멎고 한결 차분해진 모습이었지만 연하민은 그대로 연하민이었다, 능사로 돌아올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연하민은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따스한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시고 목을 축였다. 건조하고 메마른 땅에 물을 주듯, 얼어붙었던 몸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하아, 다시 한 번 젖은 한숨을 뱉은 연하민은 찻잔을 내려놓고 어깨에서 담요를 끌어내렸다. 그것을 차곡차곡 개어 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테이블 옆에 서서 아직 자리에 앉아 있는 한이현을 내려다보던 그 여자는 짧게 속삭였다.
잊어.
그리고 여자는 사무실을 나갔다. 한이현은 잠시 가만히 앉아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그 여자가 마시던 찻잔을 대신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적당히 씁쓸하고, 적당히 따스했다.